ADVERTISEMENT
오피니언 기고

‘일제강점기’ 대신 ‘대일항쟁기’로 쓰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정문헌 서울 종로구청장, 전 국회의원

정문헌 서울 종로구청장, 전 국회의원

77주년 8·15 광복절을 맞았다. 해방 이후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초대 사회부 장관을 역임한 필자의 외조부 전진한(1901~1972) 제헌 국회의원은 대한노총 초대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협동조합을 만들어 항일 운동을 하던 중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어린 시절 필자가 살던 집에는 외조부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방문해 독립운동 경험담과 우리 역사를 들려주곤 했다. 이승만·김구뿐 아니라 이름이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완강히 거부하며 자주·독립을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대한독립은 적극적 항쟁의 역사
‘일제강점기’는 당했다는 점 부각
능동적·적극적 항쟁 정신 살려야

기고

기고

대한독립은 대일항쟁의 역사다. 비폭력 만세운동에서부터 일제 요인 암살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항쟁이었다. 그 항쟁의 중심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그 법통을 계승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애국지사를 비롯한 우리 선조들의 항쟁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대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는 아직도 ‘일제강점’, ‘일제강점기’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인터넷에서 일제강점을 영문으로 검색하면 ‘Japanese Occupation’으로 표기한 곳이 많다. 심지어 정부기관에서도 ‘일본점령’이라고 표기해 한민족의 자주성을 스스로 희석하고 있다.

‘대몽항쟁기’는 익숙한데 ‘대일항쟁기’는 여전히 낯설다. 어감상으로는 고려 시대 몽골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했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래 1945년 광복에 이르는 동안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선조들이 손을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잘못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선조들의 능동적 자주성을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한민족의 대일항쟁기를 일본에서는 ‘일본통치시대’라 한다. 분명 일본이 통치했다, 다스렸다고 가르친다. 지난 4일 에토 세이시로(81) 자민당 중의원은 한·일의원연맹 합동 간사회의에서 “확실히 말하면 일본이 (한국의) 형님뻘”이라고 한 망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반해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란 용어를 써서 ‘당했다’는 점을 부각해 가르친다. 일제의 강압으로 인한 뼈저린 피해 경험을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당했다’는 피동의 프레임에서 항쟁과 희생정신은 구우일모(九牛一毛)처럼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 있으니 안타깝다.

일본처럼 극우 내셔널리즘을 자극하고 망언을 쏟아내는 정치인을 길러내자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통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 선조들의 능동성과 자주성을 후손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그래서 어떤 민족 정체성을 갖게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나라를 잃고 치욕을 당했던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되겠지만, 우리가 강력하게 맞서 싸웠던 사실도 도외시해선 안 될 일이다.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역사관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대한민국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일항쟁의 역사에서 민족자존의 전통과 교훈을 되살려 이젠 세계로 뻗어나가는 21세기의 새역사를 열어야 한다. 이것이 대한독립 정신의 계승이자 애국지사들의 꿈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07년 17대 국회에서 ‘일본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제강점기 등 유사 표현의 수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등의 표현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이고, 한민족의 항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용어라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민의의 전당 국회에서 ‘대일항쟁기’라 부르기로 15년 전에 이미 결의했으니 언론과 법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일제강점기’, ‘일제식민지시대’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일제강점’은 일제의 약탈과 우리의 수난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반영된 표현이다. 이 용어엔 일제의 총칼에도 피 흘리며 굴하지 않았던 항쟁의 역사가 자리할 곳이 없다. 호국과 자주독립을 향한 선열들의 정신과 뜻을 잇는 일이 진정한 역사의 복원이자 민족적 자존감 회복의 길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문헌 서울 종로구청장,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