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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신형의 미래를 묻다

무늬만 1위 조선업, 노새에 머무를까 사자로 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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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조선산업의 앞날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대한조선학회 회장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대한조선학회 회장

19세기 중반 미국은 통상을 요구하며 일본과 조선에 최신 선박을 보냈다. 증기기관으로 물레방아 같은 선측 외륜을 돌려 추진을 하던 철선이었다. 대양 항해는 감당이 안 되어 돛을 함께 쓴 하이브리드 추진 선박이었다. 1912년에 침몰한 타이태닉호는 강선에 프로펠러가 장착되었지만 내연기관이 아닌 증기기관을 썼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박은 내연기관으로 추력을 얻고 스크루 프로펠러로 추진하는 형태인데, 그 역사는 겨우 100년 정도다. 이처럼 인류와 함께해온 선박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오고 있다. 21세기에도 선박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고, 그 전후방 산업도 바뀌면서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선박 시장은 현존 최고의 투기판
해운 환경도 디지털·친환경 대세

한국은 후손 못 낳는 노새와 같아
‘사자의 정신’으로 판도 뒤집어야

선박도 자율주행 시대로 급진입
고급인력 양성, 연구개발 절실해

50년 동안 문제만 푸는 학생 신세

지난달 23일 오후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30만t급 초대형 원유 운반선 블록이 최종 조립을 위해 진수되고 있다. [사진 대우조선해양]

지난달 23일 오후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도크에서 30만t급 초대형 원유 운반선 블록이 최종 조립을 위해 진수되고 있다. [사진 대우조선해양]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도 시험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학교에 입학한 지 50년이 넘도록 문제만 풀고 있는 학생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조선산업이다. 문제를 푸는 실력은 1등인데도 문제를 내는 위치에 갈 생각은 못 한 채, 남이 내는 문제만 푸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제는 시험 문제를 낼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조선산업, 더 나아가 전체 해사산업의 판을 바꾸고, 국제해사기구(IMO) 등에서 룰 메이커 역할을 해야 한다.

선박 시장은 역사상,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투기판이다. 큰돈이 걸려있고,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다 보니 규제가 될 리 없다. 그런 투기판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방법은 그 판의 사자(獅子)가 되는 것이다. 서구의 왕가 문장, 국기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 사자는 지배자로 인식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조선산업은 사자가 될 충분한 잠재력이 있음에도 사자의 정신은 없이 노새로 살아가고 있다.

노새는 지어주는 짐만 지고 살다가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수탕나귀와 암말의 잡종이다. 우리 조선산업에 이제라도 사자의 정신을 불어넣어 줄 주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인의 사정도 답답하다. 지구 상의 물은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 해사산업은 웬일인지 산산이 쪼개져 있다. 조선과 해운, 해사금융은 물론, 그들을 관장하는 국가기관도 나뉘어 있고, 인력을 배출하는 교육기관도 교류가 없다. 각자 노새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과도한 경쟁을 하는 조선사들은 목표하는 시장에 따라 정리되어야 하고, 해운사들과의 협업도 강화해야 한다. 여러 부처로 나뉘어 있는 조선해운 관련 업무도 조정이 필요하다. 선박을 건조하는 교육과 운용하는 교육도 서로의 이해도를 높이고 연결되어야 한다.

한국 기업이 개발한 자동 솔루션

팬데믹과 전쟁에 따른 물류 동맥경화 중에도 선박은 국제 물류의 99%를 감당하고 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이 숫자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선박 자체는 변화를 이어갈 것이며 그 변화의 화두는 디지털 전환, 친환경 전환, 그리고 탈중앙화로 요약된다.

디지털 전환의 대표 주자 자율운항선박은 이미 자율주행자동차를 앞서 나가고 있다. 일반인이 레저보트를 운항할 때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항내에서 배를 대는 접안이다. 배는 브레이크도 없고, 물에서는 관성으로 밀려나는 거리도 크기 때문이다. 국내의 한 스타트업 회사가 이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하는 솔루션을 개발했다. 연초 세계적인 소비자 가전 전시회인 CES에 출품된 이 솔루션은 AFP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기술’ 중 하나로 선정됐다. 대형 LNG운반선에도 자체 개발한 자율운항 시스템을 탑재해 태평양을 무사히 건너오기도 했다.

자율주행자동차를 바퀴 달린 컴퓨터라고 하듯이, 원래 수많은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던 선박은 자율운항 플랫폼이 탑재되며 그 자체가 거대한 전기·전자 시스템이 되고 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시스템은 차 전체 가격의 6분의 1을 웃돈다. 자동차보다 규모가 수만 배 더 큰 선박도 자율운항 시스템이 추가되면 훨씬 비싼 고급 제품이 된다. 이제 할 일은 자율운항시스템 기술의 주도권을 선점하고, 우리의 기술이 활용되도록 패러다임 전환을 선도하는 것이다.

선원 필요 없는 원자력 추진 선박

친환경 전환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의 도출이다. LNG와 메탄올은 이미 실용화했다. 암모니아·수소·원자력 등을 연료로 하는 선박도 출현할 전망이다. 원자력은 사고 위험성 때문에 육지에서의 발전 연료로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선박에서의 사고는 그 영향이 육지보다 훨씬 적다. 최근에는 안전한 소규모 원자력 시스템도 개발이 되고 있다.

자율운항기술이 뒷받침되면 선원이 타지 않는 원자력 추진 선박이 40년 동안 연료의 추가 공급 없이 운항을 계속할 수 있다. 육지의 항만에 들어올 필요도 없다. 순환선인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선박이 큰 항로를 돌아다니고, 육해공을 넘나드는 드론을 이용하면 육지에서 먼 안전한 거리에서 상하역을 할 수 있다. 어딘가에 기항할 필요도 없이 상하역 시에만 속력을 줄이면 되기 때문에, 수년 전 문제가 되었던 모바일하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드론은 운송의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최종 배송지 또는 그 근처의 물류센터까지 직접 도달할 수 있으니 물류의 유연성이 커지고 소요시간도 크게 줄어든다.

원자력 추진 선박은 어떻게 유지·관리할까. 사람이 살지 않는 먼바다에 해상 플랫폼을 설치하면 된다. 원자력 추진 자율운항선박은 스케줄에 맞춰 플랫폼에 도킹을 하고 최소한의 인력이 모듈화된 유지관리를 하게 된다. 언뜻 보면 황당한 아이디어다. 이를 실행하는 데에 저항이 클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이 정해 놓은 틀 안에서 떠안겨주는 짐만 등에 지고 살 것인가.

탈중앙화·블록체인 기술 필수

디지털 및 친환경 전환과 꼭 동반되어야 하는 기술이 탈중앙화다. 세상은 이미 데이터로 굴러간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획득·저장·처리하는 과정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인프라, 인적 자원이 들어간다. 지속 가능한 물류의 판을 짠다면서 원래보다 더 큰 자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탈중앙화 기술인데, 시스템들이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동시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원자력 추진 선박과 드론의 운용을 중앙집중식 통제 방식으로 한다면 막대한 자원이 낭비되고 보안의 관점에서도 불안하다. 이때 해결책이 탈중앙화다. 전 세계 바다 위의 모든 시스템이 따로 또 같이하며 블록체인 기술로 보안도 유지하는 것이다. 조선산업에도 첨단 인공지능이 핵심기술이 되는 이유다.

이러한 여러 변화에 필요충분조건은 양질의 고급 인력양성과 연구개발이다. 이 둘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하나만 잘할 수는 없고 둘이 나란히 함께 움직여야 한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중국을 더 이상 경쟁자로 상대하면 안 되고, 고객으로 만들어야 한다. 선주들이 우리나라에 발주하면서 유럽의 원천기술을 쓰도록 하듯이, 앞으로는 중국이 우리 기술을 가져다 쓰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학 전공 교육이 바뀌어야 하고 재교육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 학과의 틀에 갇혀있는 대학의 전공 교육을 학생과 기업 등 수요자 중심의 체제로 바꿔야 한다. 공과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학과에 묶이지 말고 각자 적성과 희망에 맞춰 과목을 이수하고, 이수한 학점 수에 따라 한 개 또는 여러 전공의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공과대학 복수전공 활성화해야

졸업 후 40년을 일하고 살아야 하는데 어찌 전공 하나로 버티겠는가. 숨 가쁘게 빠른 속도로 달라지는 기술개발에 맞춰 재직자의 재교육도 유연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최근 도입된 학점당 학위제(micro-degree)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전공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업과 대학이 함께 힘을 합해야 한다.

정부도 당장 현업 지원보다 새로운 개념의 원천기술 개발에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LNG 운반선 주문을 싹쓸이하고 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LNG 화물창에는 프랑스 회사의 특허기술이 들어있다. 우리는 LNG선 한 척당 5% 안팎의 라이선스 비용을 내야 한다. 이 프랑스 기업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같은 기술을 진화시켜가며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꾸준한 원천기술 개발의 힘이다.

한편, 세계적인 조선사들에게 ‘감 놔라, 배 놔라’ 식의 기술 개발 지시와 현금 지원은 중단해야 한다. 대신 간접적인 금융지원, 세제 혜택, 규제 개혁 등으로 기업들이 기술개발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대한민국 조선산업에서 물류의 판을 새로 짜고 호령하는 사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운수성 선박기술연구소 연구원과 미국 플루언트의 수석엔지니어를 거쳐 2007년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에 임용됐다. 지난 1월부터 대한조선학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선박저항추진론』 등이 있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대한조선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