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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명 '우영우' 있는 그곳…"우린 없어져야 할 회사" 외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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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을 하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죠?”
“심호흡하기! 슈퍼맨 자세!”

22일 오전 서울 성동구의 기업 '베어베터' 사무실, 아침조회에서 매니저가 묻자 발달장애인 직원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슈퍼맨 자세란 양 겨드랑이에 주먹을 넣고 힘을 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자세다. 팔짱을 낀 모습이 슈퍼맨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다. 매니저는 “그렇게 했는데도 감정이 조절되지 않으면 얘기해달라”며 조회를 마쳤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해 제빵, 배달 등을 가르치는 사회적 기업 '베어베터'에서 22일 직원들이 선물용 쿠키세트를 포장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발달장애인을 고용해 제빵, 배달 등을 가르치는 사회적 기업 '베어베터'에서 22일 직원들이 선물용 쿠키세트를 포장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커피와 쿠키 등을 만드는 베어베터는 발달장애인이 직원의 70%가 넘는 사회적기업이다. 이곳에서는 직원들 사이에 몇가지 특별한 '규칙'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발달장애인이 감정 조절에 상대적으로 미숙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발달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드라마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로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현실에서 발달장애인은 일할 곳 조차 찾기 쉽지 않지만 베어베터에는 240명의 '우영우'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6년 간 지하철 노선 외워 커피 원두 배송

베어베터에서 만드는 커피 원두 제품 [베어베터 제공]

베어베터에서 만드는 커피 원두 제품 [베어베터 제공]

조회가 끝나자 직원 김현준(32)씨가 커피 원두 제품을 들고 성수역에서 남구로역으로 지하철 배송에 나섰다. 지적장애인 김씨는 지하철 7호선 노선도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남구로역에 가까워지자 그는 “다음 역은 신풍역, 그 다음은 대림역이에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노선을 외우냐고 묻자 김씨는 “원래 지하철을 좋아해요. 여러번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워졌어요”라고 말했다.

“주문하신 원두 왔습니다. 7팩 맞나요? 여기 서명해주시면 돼요.” 배달을 마친 김씨는 거래명세서에 서명을 받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김씨는 “배달 완료했다고 회사에 알려줘야 해요.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졌어요”라고 말했다.

김씨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때는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퇴근하고 집에 가서 게임기를 켤 때”다. 웬만한 단골 배송지까지 가는 길은 다 외운 어엿한 6년 차 사원이 되기까지 어려움도 있었다. 김씨는 이전에 다닌 물류회사에서는 적응하지 못해 금방 그만둬야 했다고 말했다.

300곳 넘게 지원해도 연락은 3곳만

베어베터 직원이 꽃다발의 꽃을 정리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베어베터 직원이 꽃다발의 꽃을 정리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김현준씨와 같은 발달장애인의 취업은 매우 어렵다. 드라마에서 우영우도 IQ(지능지수) 164에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한 천재지만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 동안 면접조차 본 적이 없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발달장애인 고용률은 28%로 전체 장애인 고용률인 34.6%에도 못 미친다. 자폐성 장애인 성윤채(34)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300개 넘는 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면접 기회를 준 곳은 3곳뿐이었다”고 토로했다. 성씨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발품을 판 끝에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발달장애의 한 종류다. 사회적인 규칙에 익숙하지 않고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이 있다. '스펙트럼'이란 용어에는 자폐를 '있다 없다'로 구분하는 대신 정도의 차이로 본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즉 자폐는 중증도와 지적 능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자폐성 장애인도 얼마든지 업무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베어베터의 이진희 대표도 발달장애인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 대신 특성을 이해하려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의지가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발달장애인이 일하기 위해선 직무를 단순화하고 업무를 세밀하게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네이버 인사 임원 출신인 이 대표는 자폐 스펙트럼 자녀를 둔 부모이기도 하다.

종이 넣고, 확인하고, 포장하고…단순하게 세밀하게 업무 나눠

서울 성동구 베어베터 사무실에서 이진희 대표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서울 성동구 베어베터 사무실에서 이진희 대표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베어베터는 쿠키세트와 꽃다발, 명함 등을 만들어 파는 모든 과정을 세분화 했다. 예를 들어 명함을 만드는 과정도 기계에 종이를 넣는 일, 인쇄된 종이를 검수하는 일, 명함을 통에 넣는 일 등 순서대로 나뉘어 있다. 직원들이 각자의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민희 베어베터 매니저는 “기업마다 쓰는 종이 종류가 다른데 우리 직원들은 어떤 기업이 어떤 종이를 쓰는지까지 외운다”고 말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근조 화환에 쓰이는 리본을 만드는데 처음에는 직원들이 만든 끈의 길이가 제각각이었다. 고민하던 비장애인 매니저들은 쉽게 쓸 수 있는 도구를 고안했다. 아크릴판을 뚫어 끈의 길이를 맞출 수 있는 도구를 만들자 모두 똑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모 매니저는 “업무를 나누고 배치하는 게 비장애 직원의 역할이다. 각자에게 잘 맞는 업무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한 회사 필요하지 않게…편견 없어져야” 

김현준씨를 비롯해 베어베터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이야기 나눌 때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지난 6월에는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직원들의 부모들이 롤링페이퍼를 보내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고 자녀가 많이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집에만 있을 때 하던 돌발행동이 줄어들었다.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표는 “베어베터는 궁극적으로 없어져야 할 회사”라고 말했다. “어디에서든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이런 특별한 회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이 대표는 “우영우도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나오지만 그런 사람조차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의 특성을 이해하고 편견을 갖지 않고 함께 일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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