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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연주할 때 난 힘을 얻고 씻김 느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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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지난해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14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공연을 시작으로 청중과 만난다. 김성룡 기자

지난해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14일 대구콘서트하우스 공연을 시작으로 청중과 만난다. 김성룡 기자

코로나 기간 클래식 공연계는 암흑기였다. 그럼에도 이 기간에 가장 밝게 빛난 별을 꼽으라면 단연코 피아니스트 김수연(28)이라고 말하겠다. 2021년 비대면으로 열린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하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준결선에 진출하더니 같은 해 쇼팽 콩쿠르 준결선에도 올랐다. 인터넷 생중계된 연주들은 ‘수연 김’이란 이름을 세계 음악계에 각인시켰다.

김수연의 실제 연주는 작년 11월 처음 들었다. 장윤성 지휘 부천필과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충분한 음량과 민첩한 속도, 전체를 제어하는 시각이 돋보였다. 12월 열린 리사이틀에서 그녀의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연주는 긍정적이고 자애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따금 과감하게 굽이치는 드라마도 만들었다. 올해 4월에는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에서 제임스 저드 지휘 대전시향과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3번을 들으며 영롱하게 울리는 소담스런 풍경에 빠져들었다.

김수연이 이달 서울, 대구, 부산 청중과 만난다. 14일 대구 콘서트하우스, 21일 서울 금호아트홀 연세, 27일 부산 하늘연극장, 28일 서울 신영체임버홀에서 공연한다. 11일 김수연은 “피아노의 가능성을 가장 높이 끌어올린 슈만,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내밀한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금호아트홀 공연에서는 ‘전주곡’ ‘뱃노래’ ‘악흥의 순간’ 등 라흐마니노프 작품들만 연주한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김수연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마음에 뒀던 작곡가다. “라흐마니노프 하면 큰 손과 화려한 기교가 떠오르잖아요. 한편으론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소신이 강해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고전적인 요소를 고수했죠.” 김수연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외칠 수 있고, 힘을 얻는다”면서 ‘씻김’, 즉 정화나 카타르시스에 비유했다. 내성적인 작곡가와 연주자의 만남이 기대된다.

최근에는 현대곡에도 관심이 많다. 작년 이탈리아 연주 중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동시대 음악을 접하고 끌렸다. 감정을 배제하고 수학적으로, 구조적으로 설계도 보듯 접근해야 하는 동시대 음악은 즐길 순 없지만 메시지를 준다고 했다. “인생이 즐거움만 주지는 않잖아요. 좋은 얘기만 듣고 살 수 없듯이 현대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구현하는 동시대 작곡가들의 마음이 확 다가오더군요.”

김수연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산다. 한국예술종합학교 1학년을 마치고 유학 온 모차르테움과 가까운 곳이다. 미라벨 정원과 모차르트 생가 중간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모차르트와 더욱 가까워졌다.

피아니스트에게 모차르트는 일단 어려운 작곡가다. 연주할 때 이것 하면 안 되고 저것 해도 안 되는 제약이 많다. 그가 말하는 모차르트의 키워드는 ‘순도 100퍼센트’다. 온전하게 불순물 없이 표현해야 빛나는 보석이다.

스승 파벨 길릴로프에게 음악을 대하는 겸허한 태도를 배웠다. 스승은 악보에 펜이 아닌 연필로만 표시했다. 악보가 중요하고 자신이 하는 말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단 얘기였다. 악보에 적혀있지 않은 맥락을 상상하고 연구하는 연주자의 자세도 그에게 배웠다. 프리드리히 굴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 등 모차르트 해석의 대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김수연은 투명하고 소박하지만 따뜻한 음색을 추구한다. 연주는 곧 성격이다. “인위적인 치장, 과장하는 걸 잘 못 해요. 거짓말도 못 해서 좋고 싫은 게 얼굴에 다 나타나요.”

그렇게 솔직하지만 김수연은 침착하다. 무대에 올라 떨리는 표정을 청중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욕심이 많아지면 실수를 하기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는 과정을 거치고 연습하고 준비한 것을 꺼내 놓는다.

김수연은 오는 9월 몬트리올에서 오스모 벤스케가 지휘하는 몬트리올 심포니와 베토벤 협주곡 4번을 협연한다. 10월에는 워싱턴 버지니아 스튜디오에서 스타인웨이 레이블에서 발매되는 데뷔 음반을 녹음한다. 그녀의 아이덴티티를 말해주는 소나타 K332, K311 등 모차르트 작품만 수록한다.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특히 내년 1월에는 아름다운 음악홀인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에서 데뷔한다.

연주 철학을 묻자, 모든 예술은 자전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주자는 악보에서 이야기를 캐내는 고고학자이며, 작곡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를 청중과 나누는 게 음악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

“2018년 콩쿠르 참가로 알래스카에 갔어요. 코로나 이전이었는데 30시간 넘게 걸렸죠. 파이널에 올랐는데 중년 여성분이 1차부터 제 연주를 쭉 보셨다며 두 장 빼곡히 적힌 편지와 나비 모양 펜던트를 선물로 주셨어요. 나비처럼 훨훨 날며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 달라고요. ‘연주자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구나’라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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