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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정권 100일’의 축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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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다.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았던 터라 애간장 태울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윤석열 정부의 큰 그림과 조감도가 무엇인지를. 60일이 지났다. 선거 후유증에 거친 말들이 섞였다. 출범 100일까지 한 달 남짓, 이른 장마와 삼복더위로 숨이 턱턱 막히는 절기에 통치메뉴 주방장인 이준석 대표는 오랏줄에 묶였다. 여당에 팬데믹 후폭풍과 고물가 공격을 막아낼 비장의 아이언돔을 기대하긴 틀렸다. 신임 대통령들은 항상 얘기했다. 서민과 민생을 돌보겠노라고. 이젠 안다. 그냥 하는 소리라는 것을.

한국인은 백일잔치를 중시한다. 신생아가 사(死)와 작별하고 생(生)으로 진입하는 날이다. 정권 100일이 중요한 이유다. ‘신경제 100일 작전’을 제대로 구사한 것은 YS정부였다. 당선되기 전 이미 구상이 섰고, 사계 실력자들이 모여들었고, 전광석화처럼 해치웠다.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를 불도저로 밀어붙였고, 사정개혁, 하나회 척결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1994년에는 세계화를 선언했다. YS 자신도 이게 뭔지 몰랐을 거다. 아무튼 ‘Sekyewha’라는 표기는 촌스러웠지만, 세계정세와 경제동향을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지지율이 치솟았다. 그런 정권도 성공의 달콤함을 잠시 즐기는 사이 악몽같은 외환위기를 맞았다.

정권 100일은 성패의 갈림길
큰 그림과 조감도는 안 보이고
대통령은 공부할 때가 아닌데
참호전 민주당은 헛발질 유발

출범 석 달만에 철퇴를 맞은 것은 MB정권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즐겁게 체결하고 돌아온 MB는 느닷없이 광우병 파동에 직면했다. ‘뇌송송구멍탁!’, 이 한 소절이 정권을 흔들어놓을 줄이야. 혼절한 정권이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2년이 걸렸다. 후반기 재기 의욕을 다져 ‘실용 정부’를 선언했는데 이미 호소력을 잃었다. 지금은 미국 수출 쇠고기의 24%를 한국인이 먹어치운다. ‘정권 100일’의 축문(祝文)이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성패 가도가 대충 드러난다.

그래서 섬찟하다. 윤석열 정부, 촬영 무대는 차려졌는데 배우들도 배경음악도 없다. 감독이 보이지 않고 줄거리는 그냥 개봉박두다. 주역 한 사람만 등장해 동분서주하는 양상이다. 대변인이 마이크 잡는 장면은 못봤다. 이정식 고용노동부장관이 ‘주 52시간 개편’을 발표했다가 대통령의 ‘노!’ 한마디에 주눅이 들었다. 문재인 정권이 사활을 걸었던 정책인데 5년 누적된 폐해를 단번에 제거할 대체재가 아니었다. 대기업 임금자제를 요청한 추경호 부총리도 군부정권이냐는 세간의 비난에 입을 다물었다. 세금 완화, 집값 안정은 잘 하고 있는데 타부처 수장들은 메뉴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들도 등장할까, ‘마침내’? 지난달, 주휴수당을 합친 최저임금은 드디어 1만 원대를 넘었다. 왜 큰 틀의 ‘고용주도성장’을 선언하지 않는가? 아직 문재인 정권의 질긴 유산에 갇혀 간판을 갈지 못한다.

상상력 빈곤이다. 진정한 국민의 나라? 문재인 정권 표절이다. 공정과 상식? 그것도 표절 냄새가 난다. 자유민주주의? 상식인데 애매하다. 참모진의 주류가 검사와 관료라서 그렇다. 그 직업은 상상력과 주관을 억제해야 출세할 수 있는 세계다. 운동권이 벌여놓은 무절제한 공상(空想)정치를 법조문과 규정집으로 꽉 조일 수는 있겠지만, 몰려오는 다중 쓰나미를 해치울 고차원 방정식이나 비전 개념에는 약하다. 대통령은 목하 공부 중이란다. 민간 전문가들과 ‘도시락 야자’에 돌입했다는 소식이다. 열정은 공감하는데 대통령은 공부하는 직업이 아니다. 인재들을 동원해 채근하고 정권 포부를 담은 현판을 걸고, 핵심정책을 열정적으로 구사해도 한참 늦었다. 대통령은 전문가들의 머리와 지략을 활용하는 사람이다. 관현악기 모두를 능숙하게 다루는 지휘자를 본 일이 있는가?

주연급 조연 한동훈 법무장관이 무대 뒤에서 홀로 분주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단역 뮤지컬 60일, 대통령의 개인기와 뚝심만으로 연출한 설익은 초짜 정치였다. 백년 전, 스페인 독감 팬데믹이 물러가자 식량난이 세계를 강타했다. 고물가에 실업률이 치솟아 결국 1929년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지금이 그렇다. 코로나19 후유증은 이제 막 시작됐다. 미국 이자율의 고공 행진은 한국에 환란과 인플레 공포를 몰고 왔다. 노회한 야당은 버티기 지연작전에 돌입했다. 국회가 정상가동 되려면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는 8월 28일 이후여야 한다. 합법적 지연작전의 목표는 명백하다. 윤석열 정부의 헛발질, 아니면 미수(未遂)유발. 시계(視界)가 1980년대에 멈춘 586세대의 참호전을 21세기 한국인이 감내하는 중이다.

거기에 인력난이 가중됐다. 참여를 권유해 보지만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패가망신, 멸문지화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쓸만한 인재는 죄다 초야로 돌아갔다. 윤 대통령은 서운해 물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아니, 상황이 역대 정권 중 최악이라…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이라면 이렇게 주절거렸을 터이다. “물결 높은 바다에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거머어둑 저문 천지적막에 수적(水賊)을 만난 도사공(都沙工)”…같거든요. 앞날을 가를 시간은 이제 겨우 40일 남았는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