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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식량 낭비 지적 ‘슬랙티비즘’은 사회 참여 첫걸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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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호 18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특설무대에서 열린 ‘워터밤 서울 2022’에서 관람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8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특설무대에서 열린 ‘워터밤 서울 2022’에서 관람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 [뉴스1]

덥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쳤다. 10년쯤 전 스위스에 온 이후로 올해가 가장 덥다고 느낀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우리 집뿐 아니라 스위스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가정집을 본 적이 없다. 원래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는 기후라서다. 선풍기를 단 하루도 틀지 않고 났던 여름도 있었다. 올해는 다르다. 6월 중 섭씨 35도를 넘긴 게 여러 날이다. 햇볕이 드는 순간부터 창밖 블라인드를 내려 열을 차단하고 선풍기를 튼다.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스위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서유럽 전체가 폭염과 가뭄으로 앓고 있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은 70년래 최악의 가뭄을 겪는 중이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포(Po)강이 말라 가면서 관개용수가 평상시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농업에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극심한 더위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고 에어컨이 없는 실내 장소에서의 이벤트를 금지시켰다. 스페인은 폭염과 가뭄에 산불까지 겹쳤다. 북서부 사모라는  3만1000㏊(헥타르) 이상이 잿더미가 됐다. 이것은 2004년 우엘바의 3만㏊를 경신하는, 스페인 사상 최악의 산불이다.

싸이 콘서트 ‘흠뻑쇼’ 싸고 논쟁

스페인 발렌시아는 1950년 이후 6월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스페인이 더운 나라이긴 해도 올해처럼 6월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도 발렌시아에 있는 나의 시어머니는 에어컨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전기 요금 때문이다. 2022년 5월 현재 스페인 전기요금은 187유로(메가와트시 기준)로, 2019년 1월(62유로)보다 약 3배 올랐다(스타티스타). 에너지 요금 인상은 전 유럽적 현상이다. 현재 스위스의 가스 요금은 지난해 여름에 비해 35%, 난방용 기름값은 60% 올랐다(스위스 연방통계청).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지난 겨울 유럽이 평년에 비해 춥고 길었는데 하필 에너지 공급량은 감소한 점, 천연가스 가격이 우선 상승하면서 석탄, 오일, 전기 등 다른 연료 가격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 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각국이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입을 제한한 점, 이어 러시아 스스로 유럽으로의 에너지 공급을 줄인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유럽에서 기후 및 에너지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던 중, 한국에서 가수 싸이의 콘서트 관련 논쟁이 벌어지는 걸 봤다. 발단은 배우 이엘이 6월 12일 트위터에 ‘워터밤 콘서트 물 300t 소양강에 뿌려 줬으면 좋겠다’고 올린 글이다. 이는 회당 300t의 식수를 관객에 뿌린다는 싸이의 ‘흠뻑쇼’를 겨냥한 발언이다. 7회 열린다니 총 4200t의 마실 수 있는 물을 콘서트에 쓰는 셈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가뭄이 심해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다행히도 그사이 폭우와 장마로 지금은 가뭄이 해갈됐다.) 그런데 작가 이선옥이 이엘의 트윗은 실제 행동이 아닌 ‘소셜미디어에 한마디 쓰기’ 정도로 가뭄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며 이는 PC(Political Corretness, 정치적 올바름)주의자의 엘리트 의식이자 편협한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소셜미디어에서 논쟁이 불붙었다.

‘소셜미디어에 한마디 쓰기’가 사회 운동에서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생각을 실천적 행동에 옮기고 거리에 나가 시위에 참여하는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앉아 ‘정의로워 보이는’ 포스트를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 그런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함으로써 할 일을 했다고 만족하는 것, 온라인 청원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소셜미디어 프로필 사진을 특정 주장을 담은 내용으로 바꾸는 정도로 정치적 임무를 다했다고 자위(自慰)하는 것, 여기에는 슬랙티비즘(slacktivism)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slack(느슨한)과 activism(행동주의)의 합성어다.

그럴듯한 비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배우 이엘의 트윗이 단순히 슬랙티비즘으로 폄하될 내용인가. 가뭄은 일부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모두에게 여러 형태로 영향을 미친다. 식수를 콘서트에서 흘려보낸다고 비난하는 것이 작가 이선옥의 말대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인가.

스페인 란하론에서 열리는 ‘물의 경주’ 축제. 물 낭비 지적을 받았으나 지금은 축제에 쓰인 물을 모아 마을의 관개용수로 재활용한다. [사진 란하론 웹페이지]

스페인 란하론에서 열리는 ‘물의 경주’ 축제. 물 낭비 지적을 받았으나 지금은 축제에 쓰인 물을 모아 마을의 관개용수로 재활용한다. [사진 란하론 웹페이지]

다른 나라 사례를 보자.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 지역의 마을 란하론에서는 특이한 축제가 열린다. 매년 6월 24일 자정 직후 사람들이 길에서 한 시간 동안 양동이나 호스로 서로에게 물을 뿌린다. 평균 1만5000명 정도가 참가한다. ‘물의 경주(La carrera del agua)’라 불리는 이 축제는 1979년 시작된 마을 전통으로, 봄을 떠나보내고 여름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온천으로 유명한 이 마을은 물이 풍부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물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기후 위기와 더불어 비난 강도가 높아지자, 란하론 정부는 몇 년 전 축제에 사용되는 물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않고 모아서 마을의 낮은 지역에서 관용수로 재사용한다고 밝혔다.

매년 8월 스페인 부뇰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한 번에 약 150t의 토마토가 사용되고 청소에 물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매년 8월 스페인 부뇰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한 번에 약 150t의 토마토가 사용되고 청소에 물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물이 아니라 음식이라면 어떨까. 스페인 발렌시아 지역의 부뇰이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토마티나 데 부뇰(Tomatina de Buñol)’이라는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945년 시작돼 매년 8월 마지막 수요일에 열리는 이 축제에서 사람들은 서로 토마토를 집어던지며 논다. 참가자는 2만 명 이상, 한 번에 사용되는 토마토는 150t 정도다. 당연히 식량 낭비라는 비난이 있다. 2016년 나이지리아의 소셜미디어에서 이 축제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해 나이지리아에서 나방 때문에 토마토 농사가 망했고 일부 주에서 비상사태까지 선포할 정도로 식량이 부족했다.   나이지리아인들은 ‘우리는 ‘토마토 에볼라’로 먹을 게 부족한데 스페인에서는 토마토를 갖고 노느냐’며 분개했다. 비난은 스페인 내부에서도 나왔다. 스페인 푸드뱅크연합 회장 니콜라스 팔라시오스는 2017년 “식량 낭비에 맞서 싸우는 푸드뱅크가 보기에 이 축제는 낭비다. 즐기는 걸 반대하지는 않지만 토마토 대신 다른 것을 찾으면 좋겠다”고 했다(스페인 일간지 ABC 인터뷰). 그러자 축제에 토마토를 공급하는 회사에서 입장을 밝혔다. 7~8월에 수확하는 토마토 중 시장에서 팔 수 없는 등급 미달의 상품만 모아 제공하며, 아주 무른 품종이라 식량 부족 국가로 운송하는 것도 어렵고 축제가 아니라면 그냥 버려야 하기 때문에 농부들에게 더 큰 손해라고 한다. 하지만 비난은 이어지고 있다. 축제가 끝나면 소방차가 와서 붉게 물든 길을 씻어 내리고 참가자들은 동네 주민들의 집에 연결된 호스로 몸을 씻는다. 그 물은 낭비가 아니냐는 거다.

이탈리아선 가축 절반이 물 부족 위기

매년 8월 스페인 부뇰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한 번에 약 150t의 토마토가 사용되고 청소에 물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라토마티나]

매년 8월 스페인 부뇰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한 번에 약 150t의 토마토가 사용되고 청소에 물이 많이 들기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라토마티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을 손가락질하거나 죄책감을 전가하는 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는 맥락을 간과한 채 모두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사실상 강요하는 행태에 문제가 많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사안에는 경중이 있다. 당장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합심해서 한 방향으로 노력해도 모자랄 기후 위기 앞에서 물 낭비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자신을 과시하려 한다느니, 선민의식이라느니 하는 건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트위터에서 배우 이엘의 메시지를 보고 물 낭비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을 수 있다. 슬랙티비즘은 종종 사회 참여를 위한 첫걸음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뭄으로 식수가 부족할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 지역은 지난 6월 24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공공장소의 분수 작동을 중단하고 살수 장비 사용도 제한한다. 밀라노 상점들은 에어컨 온도를 26도 이하로 내리는 게 금지됐고 냉방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가게 문도 닫아 둬야 한다. 주제페 살라 밀라노 시장이 이를 페이스북에 공유하자 댓글 수백 개가 달렸다. 대부분 조치에 찬성하는 내용이다. 이탈리아 농작물의 3분의 1과 가축의 절반 이상이 물 부족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경제 활동의 자유를 우려하거나 분수 작동 중지로 인한 관광 인프라 축소를 지적하는 이들은 없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한국의 가뭄이 해소되긴 했지만 지난달 극한 가뭄 상황에서 나온 이엘의 트윗을 ‘PC주의’로 트집 잡을 수만은 없지 않나 싶다. 유사한 상황에서 그런 일은 언제라도 또다시 벌어질 것이다. 많은 논쟁을 거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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