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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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3부 남로당의 궤멸/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간부학교 졸업 후 “거지신세”/기댈곳 찾으려 농림성 들렀다 정태식과 해후
목숨을 걸다시피해 험악한 산고개들을 넘어 백설에 뒤덮인 들판으로 나왔다. 한밤중이었는데 마침 유엔군 비행기들의 정찰을 피해 서있는 중공군을 태운 유개화차를 만났다.
나는 문이 열린 화차앞으로 가서 좀 태워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그들은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나는 분해서 『여기는 조선땅이다. 우리가 주인이다. 당신들은 조중사이를 형제라 하면서 어떻게 그리 비우의적일 수 있는가. 당신들 부대장이 어디 있는가』하고 중국말로 호통을 쳤다. 그러니 그들은 대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화차위에 뛰어올라 탔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하늘의 비행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차안의 중공군은 모두 다 서서 추워 발을 동동구르며 기침들을 해댔다. 화차바닥을 보니 가래침으로 번질번질했다. 그래서 그들은 앉아있지 못하고 다 서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더러워 더이상 그들사이에 서 있을 수가 없어 얼어죽을 각오로 화차에서 뛰어 내렸다.
3월20일 자강도 간부학교를 떠난지 꼭 한달만에 나는 평양에 도착했다. 3월 해동이 되면서 북한에는 발진티푸스가 발생해 수만명이 병사했다.
너무나 사람이 많이 죽어 북조선 당국은 미군이 세균을 뿌려 죽었다고 선전했다. 나는 그렇게 고생을 해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평양에 도착했으나 어디로 찾아갈 데도 없고 반가이 맞아줄 사람도 없으니 정말 망망했다. 그래도 나는 간부부 부부장 이범순과 남로당 중앙검열위원장 김형선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박헌영은 이승엽을 통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김형선은 어디 있는지 몰라 우선 중앙당의 이범순을 찾아갔다. 중앙당 앞에서 마침 서울에서 이범순의 비서를 하던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10월10일부터 김일성을 위시해 북조선 정권 간부들은 거의 다 피신하고 이범순이 평양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10월17일 유엔군의 총공격때 평양을 사수하라는 김일성의 녹음방송을 하려다가 탈출의 시기를 잃고 가루게(평양시 북부거리의 이름)에서 유엔군과 맞부닥쳐 장렬한 전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작년 9월에 서울을 떠날 때 입고있던 미군 여름바지 궁둥이가 다 떨어져 우선 바지를 하나 구해 입어야 하겠기에 재정성의 윤형식 부상(차관)을 찾아갔었다. 재정성은 대동강변 청류벽에 있는 영도사라는 절간에 있었다.
산을 뚫은 터널속에 윤형식이 있었다. 바지를 하나 빌려달라 하니 자기도 6ㆍ25때 서울에 갔다가 유엔군에 쫓겨 만주까지 후퇴했다가 평양에 돌아오니 집이 약탈당해 입고있는 바지 뿐이라는 것이었다.
윤형식에게 김형선 안부를 물었더니 자기도 소문으로 들었는데 서울에서 후퇴해오다가 도중에 암살당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또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나의 의사를 박헌영에게 직접 전달해줄 사람은 김형선 밖에 없었다. 그는 당 검열위원장이었다. 당내의 부정을 바로잡는 직책에 있었다. 이승엽의 나에 대한 이유없는 처우를 당적 입장에서 정정당당히 바로잡아줄 사람이었다.
찾아가 볼만한 데가 없었다.
중앙당 연락부에 찾아가면 상당히 높은 지위에도 오를 수 있고 생활도 걱정없겠지만 연락부는 대남공작을 하는 부서라 나는 다시는 대남공작은 하기 싫었다.
그리고 연락부는 이승엽의 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반드시 남한에 파견해 죽이고 말 것이 뻔했다.
거지같이 평양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결국 농림성의 박문규상(장관)을 찾아갔다.
박문규는 서울에서 민주주의 민족전선 제2대 사무총장을 할때 내가 자주 그의 방을 찾아갔던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경북 청도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제1회 졸업생인데 당시 조선에서는 제일가는 인텔리며 온후한 성격이었다. 농림성은 진남포로 나가는 보통강 근처의 산 굴속에 있었다.
박문규는 나를 반가이 맞아 주며 원산 농과대학을 비롯한 수십개의 학교를 관할하는 교육부장을 곧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태식도 농림성 기획처 부처장으로 여기 있다고 곧 불러주는 것이었다.
나는 정태식은 후퇴도중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정태식을 만나니 채항석과 장병민부부도 이 근처에 무사히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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