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 더 참을 수 없다/송복 연세대 교수 정치사회학(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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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몫찾기 급급… 국민 안중에도 없어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던가.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보고 있으면 마치 1백년 전으로 후퇴해서 1880년대 이후 위기상황 속의 조선조말 정치현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수구파와 개화파의 그 악다구니같은 싸움. 무엇을 수구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물러섬이 없이 싸웠고,무엇을 개화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악랄히 대결했는가. 남에서 북에서 동에서 서에서 태풍은 시속 수백㎞로 불어오고 있는데,그 태풍을 누구 하나 감지하는 사람 없이 자기들끼리 안에서 불공대천의 원수처럼 싸우다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수구파는 나라를 들어먹는 일이 있어도 개화파에게만은 권력의 한 자리도 넘겨줄 수 없다고 뻗대고,개화파는 설혹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통째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수구파에게서만은 권력을 빼앗아야겠다고 날뛰다 마침내 나라꼴이 어떻게 됐는가.
이 제도를 지켜야 나라가 선다,그 제도를 바꾸어야 나라가 된다하고 다투던 그 제도싸움이 나라 위한 싸움이었는가,권력쟁탈전이었는가. 내건 명분도 어쩌면 이제나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 제도 「도탄에 빠진 백성」 구한다는 것이었다. 그 정치판 놀음으로 나라는 거덜나고 백성은 정말 「도탄」에 빠지고,역사는 지난 1백년의 격동기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상황이 무엇이 다른가. 페르시아만사태,우루과이라운드,고유가,신흥공업국들의 추격,소련ㆍ중국ㆍ북방나라들의 변화,거기에 일본 자위대가 다시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안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태풍이 얼마의 속도로 불어오고 있는지는 고사하고,도대체 그런 태풍이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이다.
그 정치하는 사람들의 정치가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고,그나마 믿었던 경제도 수출부진,성장률의 둔화,제조업의 감퇴,인플레 압력 등으로 간단없이 위협당하고 있고,사회는 모두 제몫찾기에 혈안이 되어 개인이기주의ㆍ집단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고,윤리는 도덕성의 위기를 끊임없이 절규하는 무규범의 혼란상태,위법이 생활화되어 있는 상태로 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이판에 도대체 내각제는 무슨 의미가 있고,대통령제는 무슨 의미가 있으며,지방자치제는 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그 본이 무너져가는데 그 말을 잡고 사생결단을 내자는 사람들이 도대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나간 사람들인가. 줄기는 흑벌레가 달려들어서 고사목이 될 것인지 소생할 여망이 있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판에 가지를 잡고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있다면,도대체 그 사람들이 골이 있는 사람들인가,골이 빈 사람들인가.
60,70년대와 80년대의 그 뼈를 깎는 노력으로 그나마 몇 개의 돌덩이가 올려져 있는 형상으로 쌓아놓은 탑마저도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그들이 오늘날까지 국민을 위해서 한 일은 무엇인가. 전국민들이 피땀을 흘리며 갖은 난관을 헤치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려 할 때,그들이 국민에게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월남의 그 전쟁터에서,중동의 열사에서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전국민이 버둥거리며 노력할 때 그들은 뭘하고 있었던 사람들인가. 그들이 한톨의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가. 하나의 상품을 더 수출하기 위해서 기름 묻은 걸레질이라도 해본 일이 있는 사람들인가. 고작 뒷짐지고 서서 「배를 산으로 올리는 일」 말고는 그들이 오늘날까지 국민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마치 굶주린 이리 먹이 노리듯 오로지 국가권력에만 침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 그 국가권력이 그들의 무슨 특허품이 되는 듯,오로지 그들만의 전유물인 양 그것을 독차지하는 궁리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무슨 자격으로,무슨 기여를 했기에 오늘날 한국사회가 그들의 난장판일 수 있는가. 어째서 허리 펼 날 없이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 국민들이 그들의 피해자일 수 있는가.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들은 다른 먼나라의 사람들인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기에 「우리 국민」이 그렇게도 그들의 안중에 없는가.
국회는 뭐하려고 만들어져 있는가. 먼나라에서 오신 귀하신 이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연회장으로 만들어놓은 것인가. 그들이 그 연회장에서 벌이는 무도회의 춤을 국민들이 구경하자고 그 판을 벌여준 것인가. 그러다가 그 춤도 지루하면 이젠 다른 판을 만들어주시오 하고 퇴장하는 그 꼴을 보자고 국민들이 그 판을 만들어준 것인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가 지쳐 있다.
지난 60년대 이후 30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모두가 기진맥진해 있다. 그 국민의 이익을 지켜준다고 나선 사람들이 이익은 고사하고 이익의 터전마저 송두리째 파괴시키고 있다면,그들도 우리와 생각을 같이하는 우리들의 국민인가. 우리와 요구를 같이하고 우리와 가치를 같이하는 우리가 뽑아 내놓은 우리들의 사람인가.
나라가 망하는지,폭풍이 어디서 어떻게 불어오고 있는지,땅덩이가 홍수에 휘말려 떠내려가는지조차도 모르고 권력싸움에만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 그들이 어찌 운명을 같이하는 우리들 국민일 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돌아온 탕아를 맞이해줄 여유있는 아버지가 있고 자비로운 어머니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선 탕아를 수용할 여유도 없고 견뎌내줄 여력도 없다. 모두가 더이상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다. 모두가 극한상황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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