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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단번도약’ 기회 놓친 김정은…문제는 타이밍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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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의 3가지 실기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2010년 5월 말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고위 탈북자 A씨를 만난 적이 있다. 북한에서 무기 개발에 관여했던 인물로, 그해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였다. 당국은 사건 발생 해역에서 수거했다며 어뢰 추진체를 공개했다. 북한이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제작한 CHT-O2D 어뢰 소개서와 함께였다. 당시 조사단은 수거한 추진체와 어뢰 설계도가 일치한다는 점을 천안함 폭침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스모킹 건으로 제시했다. 사건 발생 며칠전 북한 연어급 잠수함이 기지를 출발했고, CHT-O2D어뢰로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내용을 접한 A씨의 견해는 이랬다.

“북한의 속성을 알아야 해요. 그런 공격은 200% 성공 가능성이 있어야 감행하는 거야. 기계를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고장이 날 수 있지. 그렇다면 눈으로 직접 보고 공격하는 방식을 택하는 게 북한이야. CHT-O2D 어뢰 잔해가 발견됐는데, 이를 인간 어뢰로 개조했을 수 있어요. 북한은 1970년대 초 인간 어뢰를 들여가 여러 방식으로 개조했거든요.”

고도로 훈련받은 ‘요원’을 투입해 잠수함에서 인간 어뢰를 몰고 천안함 바로 밑까지 접근해 자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2년이 지난 시점에 A씨의 ‘200%’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건 최고지도자가 바뀌었지만 북한의 속성은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고위 탈북자 “북, 200% 성공 가능성 있어야 움직여”
코로나19 백신 지원 거부하고 미사일만 17차례 발사
한국계 유엔 사무총장, 세계은행 총재 때도 핵 올인
트럼프의 ‘영변+α ’ 거부로 대북제재 해제 기회 놓쳐
남과 북 모두 실용과 유연성으로 비핵화 이뤄내야

신중함인가, 실기인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5일 부인 이설주씨와 벤츠 마이바흐 S600 풀만 가드 리무진을 타고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 행사장에 도착하고 있다. [조선중앙TV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5일 부인 이설주씨와 벤츠 마이바흐 S600 풀만 가드 리무진을 타고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 행사장에 도착하고 있다. [조선중앙TV캡처]

북한은 지난달 12일 정치국회의를 하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국경을 닫은 채 셀프 봉쇄에 나선 지 28개월 만이다. 북한은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2020년 1월 외부와 접촉을 끊으며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정책을 택했다. 10여 년 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이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수개월 만에 사그라든 두 차례의 전염병 때와 달리 북한은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했다. 상당수 국가가 코로나19 홍역을 치르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북한 스스로 ‘대동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북한은 지난달 16일(발표일 기준, 39만2920명)을 정점으로 12일 만에 의심 환자가 10만 명(하루 발생) 아래로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다행이다. 개인의 경제생활 등을 고려하지 않는 통제사회인 북한이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폭발력을 고려하면 아직 꺼진 불이 아니다. 마이크 라이언 세계보건기구(WHO) 긴급대응팀장은 1일(현지시간)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악화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2018년 가을 대북제재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경유해 들여간 것으로 추정되는 벤츠 마이바흐 S600승용차. [조선중앙TV캡처]

북한이 2018년 가을 대북제재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경유해 들여간 것으로 추정되는 벤츠 마이바흐 S600승용차. [조선중앙TV캡처]

여기서 한 가지. 한국과 미국은 지난해부터 북한에 백신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달 10일 출범한 윤석열 정부도 백신 지원을 검토했다. 미국은 지난해 말 북한 주민 전체가 세 차례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인 6000만 도스를 지원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했다. 뉴욕의 유엔에 파견된 북한 대표부를 통해서다. 당시 북한 측(김성 대사)에선 “화이자나 모더나냐.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후 북한의 응답은 없었다. 오히려 북한은 올해 들어 17차례 미사일을 쏘며 군사적인 긴장을 택했다. 북한이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사실을 공개한 건 외부의 지원을 염두에 둔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북한은 지난달 25일에도 미사일을 쐈다. 북한이 미사일 대신 백신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에 호응했다면 주민들의 피해가 줄고, 북·미 대화를 재개할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북한이 기회를 놓친 사례는 또 있다. 김 위원장은 집권 이후 ‘단번도약’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CNC(컴퓨터 수치제어) 등 과학기술을 활용해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었다. 국제사회와의 교류·협력이 필수조건이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김 위원장은 2018년부터 한국과 미국·중국 등과 정상회담에 나섰다. 하지만 2019년 2월 베트남에서 열렸던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과 추가 시설(α·알파)을 불능화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을 거부한 북한은 ‘장기전’과 ‘허리띠 졸라매기’로 돌아섰다.

핵에 발목 잡힌 ‘단번도약’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시간을 되돌려보자. 지난 2018년 5월 김용 당시 세계은행 총재(2012~2019년)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국내 북한 전문가 2명과 만났다.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고, 대북경제협력 프로젝트를 논의하던 시점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행되고, 북·미관계가 풀리면 국제사회의 대규모 대북투자를 추진하는 게 골자였다. 김 총재는 국내 전문가의 견해를 청취하는 자리에 세계은행 북한 부서의 책임자도 참석시켰다. 다른 직원들도 들어보라는 취지였을 게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2007~2016년) 역시 재임 시절 방북을 검토하는 등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뛰었다. 북한이 국제사회와 교류에 나서는데 더없이 좋은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이 시기 핵과 미사일 개발이 우선이었다.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을 발사하는 데 올인하던 북한은 반 총장이 유엔을 떠나고, 김 총재가 퇴임을 앞둔 2018년이 돼서야 움직였다. 북한은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뒤 (미국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렸다”고 밝혔다. 반대로 북한이 핵만 들여다보느라 자신들을 우호적으로 생각했던 ‘세계 대통령’과 ‘국제 금융 총수’의 투톱 체제라는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과거에서 교훈을 찾고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건 미래 설계의 필수조건이다. 북한은 앞으로도 자신들만의 방식인 주체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다. 국제사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 목소리가 나오는 속에서도 7차 핵실험 준비에 나서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싸늘해질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이 ‘200%를 위한 고심’에 나서다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선 윤석열 정부의 역할도 크다. 다음 한국 대통령 선거까지 57개월여 남았다. 20분의 1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북한의 변화만 기다리며 시간이 흐른다면 5년 단임제인 윤 대통령이 점점 시간에 쫓길 가능성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남북관계를)풀어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먼저라는 전제 조건에 발목이 잡혔다. 현 정부 외교안보의 핵심에 이명박 정부 때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다. 남도 북도 ‘장고 끝에 악수’가 아닌 실용과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는 법이니까.

북한 열병식 다큐에 나온 김정은의 벤츠는?

지난달 28일 북한은 ‘조선의 존엄과 위용을 과시한 주체의 열병식’이란 제목의 2시간 35분짜리 기록영화(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년을 기념해 북한이 4월 25일 밤 진행한 열병식 준비와 당일 열병식 전 과정, 열병식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가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북한이 열병식 한 달여 뒤 공개한 기록영화에서 눈길 끄는 장면 하나가 포착됐다. 영화 시작 12분 30초쯤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김 위원장은 작은북을 맨 군악대 앞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김 위원장의 뒤편에 그가 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은 그동안 공개된 김 위원장의 전용차와 다른 종류였다.

김 위원장은 비포장도로의 현장을 찾을 때 레인지로버(2016년 9월)나 렉서스(2020년 8월)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을 타곤 했다. 그러나 그가 공식 행사에 등장할 땐 언제나 마이바흐 S600 풀만 가드나 마이바흐 S62 등 최고급 벤츠 리무진이었다. 북한은 이들 차량을 화물기나 열차에 실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싱가포르나 베트남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에서도 김 위원장이 이용토록 했다.

기록영화에 나온 차량은 2018년 가을 북한이 네덜란드 등을 거쳐 들여간 두 대의 벤츠 마이바흐 S600 중 하나인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대북제재 속에서 직접 수입이 어려워지자 여러 나라를 거쳐 가는 방식으로 ‘세탁’한 뒤 들여간 그 벤츠라는 얘기다. 정보 당국자는 “김 위원장이 열병식장에는 풀만 가드를 타고 나타났다”며 “김 위원장은 여러 대의 전용차를 보유하고 있는데 공식행사에는 리무진을, 일반적으로는 S600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