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향은의 트렌드터치

위기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단어 ‘쇄신’, 뼈를 깎는 쇄신을 하겠노라 지지를 호소하는 후보자들에게서 미안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단어에 깃든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순다는 뜻의 쇄신(刷新)이나, 가죽을 벗겨 쓸모없는 부분을 도려내어 쓸모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의 혁신(革新)은 모두 엄청난 통증을 수반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MZ세대의 성지로 소문난 ‘더 현대 서울’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연구대상인 MZ들의 공간을 기획하기 위해 기존의 성공방정식을 모두 바꾸었다. 기획 당시 대표이사가 “지하 2층은 내가 모르는 브랜드로만 채워라”라고 한 지시가 혁신을 갈구하는 레거시 기업의 획기적인 의사결정으로 회자하고 있다. 전통적인 유통 강자 현대백화점은 놀라운 속도로 변하는 시장과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응하는 미래형 리테일을 만들고자 하였고, 절치부심의 자세로 익숙하게 잘하는 것 대신 못 하고 어색한 것들에 도전했다.

‘더 현대 서울’과 MS의 혁신노력
위기 대응력보다 이해력이 우선
기존 성공방정식 버릴 용기 필요
유연한 성장형 사고방식 갖춰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기엔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그 영광을 가져다준 성공방정식을 고집하는 한 호락호락 틈을 내어 주지 않는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기 어렵다. 1990년대 잘나가던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 구찌는 경쟁 브랜드들의 득세에 밀려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던 2016년, 구찌의 아이덴티티를 재해석해서 기존 구찌 스타일을 뒤엎어버린 무명 디렉터의 활약으로 구찌는 다시 살아났다. 세련된 통제와 절제미의 구찌에서 꿈을 꾸고 이야기하듯 감정이 넘실대는 위트의 디자인으로 단숨에 젊어진 구찌는 개성과 가치를 중시하는 MZ들에게 구애하며 뉴 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디지털 마케팅에 폭격을 가했고, 결과적으로 일흔세 살의 구찌를 스물세 살로 회춘시켰다.

위기를 어떻게 넘겼느냐를 논하기에 앞서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했느냐의 과정이 중요하다.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이기 때문이다. 위기에도 맥락이 있다. 위기 대응력보다 중요한 것이 위기 이해력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a Gramsci)는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 혼돈 상황”을 위기라 했다. 레거시가 강한 기업일수록 시스템이 해주는 위기관리 능력은 좋지만, 리더들이 해야 하는 위기 이해력은 상대적으로 낮다. 성공체험이 조직문화에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죽기 전까지 스스로 혁신을 모색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모든 것에 빠르고 기민한 IT업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타임지가 극찬한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스티븐 발머도 새로운 시대가 모바일 중심으로 재편되리라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위대한 창시자 빌 게이츠가 만든 윈도는 막강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주는 마르지 않는 샘 같았다. 그래서 모바일을 뒷전으로 둔 채 안정적인 사업만 추구하며 성장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애플과 구글은 클라우드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던 2007년 MS는 결국 추락 위기에 직면했다.

본인을 승자이자 리더로 인식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고정형 사고방식과 어떤 고정된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유연하게 자신을 상황에 적응시켜 나가는 성장형 사고방식이 있다. 트렌드는 쫓는 것이 아니라 파악해야 하는 대상이며, 이는 성장형 사고방식을 촉진한다. 스티븐 발머의 후임 CEO 사티아 나델라는 모바일 퍼스트, 클라우드 퍼스트를 주창하며 사업구조를 완전히 재편했고, 그 덕에 MS는 클라우드 통합 서비스 점유율 세계 1위 기업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위기를 인식하고 시대를 읽어내는 일, 트렌드는 알고만 있을 때보다 실행으로 옮길 때 파괴력이 있다.

전통보다 혁신이 존중받는 사회다. 관성에 물든 조직문화 속에서 사내정치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가. 사람들이 변화와 혁신에 저항하는 이유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며 답이 없는 질문을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가야 하며, 두려워도 도전해야 한다. 혁신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서 나와 용기를 내야 한다. 점점 위기는 상시화하고 있다. 본인의 성공방정식을 깨고, 의구심에 갇혀 있는 혁신의 DNA를 깨워라. 당신의 위기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