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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안-생일 파티’와 창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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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비대면 안생일 파티(An Un-tact Un-Birthday)’는 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작곡동인 ‘창악회’ 정기발표회에서 연주된 작곡가 최진화의 작품이다. 1년에 생일은 하루뿐인데 비해, ‘안-생일(Un-Birthday)’은 그 하루를 뺀 모든 날이므로, 안생일 파티는 1년 내내 할 수 있다는 기발한 발상은 루이스 캐롤의 소설 『거울나라의 앨리스』(1871)에서 나온 것이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퍼포먼스로 구성된 ‘비대면 안생일 파티’에서 작곡가는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Untact)이라는 새로운 일상이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안생일파티’를 연상시켜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홀로 무대에 등장한 피아니스트 강지현은 피아노의 가장 낮은 건반까지 계속 하강하는 선율을 연주하며 단편적인 음악 패턴을 선보였고, 화려한 장식의 모자를 들고 뒤늦게 등장해 피아노 주위를 산책한 후 연주를 시작하려는 피아니스트 황보영의 피아노 뚜껑을 닫고 악보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작곡동인 창악회 64돌 기념연주
‘생일 뺀 모든 날이 생일’ 들려줘
코로나19 시대의 음악적 반향

‘비대면 안생일 파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강지현(왼쪽)과 황보영. [사진 창악회]

‘비대면 안생일 파티’에 참여한 피아니스트 강지현(왼쪽)과 황보영. [사진 창악회]

이후 지속된 두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단조롭게 천천히 상승하거나 하강하다가, 갑작스럽게 폭팔하고 이어 침묵하는 흐름을 보였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색다른 모험을 감행한 『거울나라 앨리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그 어떤 질문이 재치있게 표현된 작품이었다.

이날 연주회는 전반적으로  모더니즘적인 진지함이 주를 이루었다. 첫 곡은 창악회 콩쿨 최우수상작 ‘그렇게 흐른다’였다. 대학생 장선일의 작품으로, 바이올린은 정제되지 않은 거친 사운드의 질감을 면면이 이어갔다. 뭔가 사건이 벌어질 듯했지만 벌어지지 않고, 반복되는 패턴의 진행 속에서 들릴락 말락한 한 줄기 빛을 느낄 수 있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김청은의 ‘데이브레이크(Daybreak)’는 피아노의 낮은 저음과 한없이 상승하는 바이올린의 진행 속에서 긴 밤 이후의 새벽의 설렘이 어스름하게 그려진 작품이었다. 팬데믹 시기에 느낀 어둡고 칠흑 같은 겨울밤의 아픔과 이를 벗어나는 희망의 속삭임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작곡가의 의도를 차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고된 삶에 대한 음악적 치유를 꿈꾸는 작곡가 이혜성의 ‘위로 5-그리움’은 협화와 불협화, 유니즌의 만남과 어긋남을 오가며 두 대의 첼로가 빗어내는 그윽한 저음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감을 위로하는 음악, 그에 대한 묵직한 그리움을 담아낸 선율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화가 김홍도의 그림을 주제로 한 이귀숙의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는 37관 생황과 타악 2인을 위한 곡이다. 달빛 아래 유유자적하며 생황을 부는 고독한 젊은이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정취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형상화되었다. 특히 화려한 생황의 음색과 장구·꽹가리 등 전통 타악기가 어우러진 독특한 사운드는 그로테스크적인 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새로웠다. 이만방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잊혀진 노래’는 팔십을 바라보는 노작곡가의 담백한 마음이 담긴 곡이었다. ‘무엇이 나를 형성해온 본질이며 본체인가?’라는 이만방 자신의 질문을 민요적 선율이 담긴 주제 선율로 풀어내며 천천히 청중을 사색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번 작곡발표회는 창악회의 64번째 기념 음악회이다. 창악회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곡 동인 중의 하나로 1958년 이성재·정회갑·김달성·이남수·이치완·최춘근 등 6명 회원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면면히 그 맥을 이어가며, 한국 현대음악계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알차게 꾸며진 이번 연주회를 보면서 그 전통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쉬웠던 점은 이날 연주회장이 썰렁했다는 것이다. 코로나로부터의 일상회복 이후 많은 공연장이 청중으로 가득차고 있지만, 유독 이날 공연의 관객은 적었다.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안-생일 파티’가 그리워지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 『거울 속의 앨리스』에서 험프티 덤프티는 여왕으로부터 받은 ‘안-생일 선물’을 앨리스에게 자랑한다. 둘은 365-1의 계산을 하며 364일동안 받을 수 있는 선물에 대해 대화한다. 생일이 아닌 날 계속 선물을 받는 삶이란 상상만해도 즐겁다. 창악회는 64번째 생일이 되는 이번 연주회에서 청중의 공감이라는 선물을 받지 못했지만, 안-생일인 나머지 날에는 좀 더 청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좋겠다. 이번 생일에 연주된 의미있는 작품들이 그 씨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를 위해 작곡가와 청중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