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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리더가 신인가? ‘신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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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혁신 리더의 자질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국제 콘퍼런스에서 기술예측이나 기술기획에 관한 발표를 접하다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눈에 띈다. 다소 무리하게 일반화해 본다면 대체로 러시아나 중국 측 연구자들이 발표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발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현재 기술예측과 기획 분야에서 연구를 선도하고 있는 곳도 러시아와 중국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싱가포르처럼 작은 나라나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크게 흥미를 보인다는 점이다. 수년간 이런 특징적인 패턴을 접하면서 희한하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한 생각이 번뜩 들었다. 혹시 계획경제의 경험이 많은 국가들이라서 정확한 예측과 계획에 관심을 갖는 것 아닐까. 싱가포르처럼 규모가 작은 국가는 계획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예측에 주목하는 것이고,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의 동향을 빨리 벤치마킹해서 효과적인 추격전략을 수립해야 하니 관심을 갖는 게 아닐까. 반대로 미국이나 유럽권 사람들이 무덤덤한 것은 계획경제의 유산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 아닐까.

“나만 아는 방법 있다” 생각 위험
톱다운 방식으론 혁신기술 불가

사안 복잡할수록 해법도 늘어나
국가도 과학도 시행착오로 진화

리더의 기본조건은 “나는 모른다”
선진국 모범사례도 정답 아니야


인공지능이 설계한 반도체

공산권이나 개발도상국 등 계획경제 경험이 많은 나라일수록 정확한 예측과 계획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하나의 정답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일수록 재앙적 결과가 올 가능성이 커진다.

공산권이나 개발도상국 등 계획경제 경험이 많은 나라일수록 정확한 예측과 계획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하나의 정답을 교조적으로 밀어붙일수록 재앙적 결과가 올 가능성이 커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혁신적 기술은 탁월한 전문가가 정확하게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최적의 해법을 톱다운으로 기획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좌충우돌하면서 진화한 결과 얻어지는 사후적 결과물이다. 아예 이런 진화적 방식을 신기술 설계에 적용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인공지능으로 설계한 반도체다. 최신의 고성능 반도체에는 100억 개 이상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간다. 이렇게 많은 소자를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수백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여러 달 머리를 쥐어 짜내야 한다.

2021년 6월 구글 연구팀이 새로운 버전의 고성능 반도체를 인공지능 알고리즘으로 6시간 만에 설계한 획기적인 결과를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기존에 사람이 하던 일을 반도체 설계도면 1만 종을 머신러닝으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스스로 배치하도록 한 것이다.

원리는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배치를 여러 개 해보고, 평가하고, 그중 나은 것을 고른 다음, 거기서부터 다시 배치를 조금 더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고, 선택하는 과정을 빠르게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행착오를 쌓으면서 조금씩 더 좋은 배치 방법을 찾아가는 진화적 학습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기존의 학습한 도면들은 대안을 빨리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논문의 맨 마지막에는 기존의 경험과 교과서 논리를 근거로 전문가들이 설계한 것과 인공지능이 진화적으로 설계한 두 장의 반도체 표면 사진이 첨부돼 있다. 전자를 하향식, 후자를 상향식 설계라고 한다. 전문가들이 하향식으로 설계한 것은 보기에도 매끈하지만, 인공지능이 상향식으로 설계한 것은 무언가가 뭉쳐있는 듯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상향식 설계의 장점은 분명했다. 기존에 사람이 수개월 걸려 하던 설계를 불과 6시간 만에 해냈을 뿐 아니라 회로 길이도 더 짧았고, 전력소모 등 다른 성능도 더 뛰어났다.

NASA의 인공위성 안테나 실험

미국 NASA의 진화적 설계로 만든 소형 인공위성용 안테나.

미국 NASA의 진화적 설계로 만든 소형 인공위성용 안테나.

비슷한 연구결과가 2006년에도 발표되었다. 이번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소형 인공위성에 들어갈 안테나였다. 동전보다 작은 초소형 안테나를 설계해야 하는데, 핵심은 안테나 침의 모양을 최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연구자들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시행착오를 쌓아가면서 침의 모양을 진화시키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절차는 앞의 사례와 같다. 답을 모른다고 가정하고, 처음 몇 가지의 모양을 임의대로 만든다. 그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선택된 것을 기반으로 조금 더 개선될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여러 가지 대안을 만들어 평가하고, 좋을 것을 선택한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변형시켜도 성능이 올라가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상태가 되는데, 이때의 모양이 최적 안테나 모양이다. 발표된 결과물의 모양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안테나만을 평생 연구해온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영 마땅찮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성능은 더 뛰어나다. 늘 하향식으로 설계해 온 전문가들은 이런 모양을 아예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겠지만, 이 설계는 분명 해법의 하나로 존재했었다. 다만 전문가의 경험 범위와 교과서에 밖에 있었을 따름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일단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상향식으로 여러 대안을 탐색해나갔기 때문에 발견된 것이다.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변이가 생기고, 환경에 더 적합한 것이 살아남지만,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은 것으로부터 다시 변이가 생기고 선택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시행착오를 축적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진화의 과정을 정확히 예측하고, 사전에 기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연의 진화, 기술의 진화

혁신적 기술이 진화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개선했으면, 혹은 이렇게 되면 좋겠다는 문제의식과 비전, 즉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선택을 하면서 나머지 대안들은 버린다. 거기서부터 다시 실험하면서 시행착오를 쌓은 끝에 새로운 혁신적 기술이 탄생하는 것이다.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1개의 좋은 아이디어에 선택·집중하는 것보다 1000개나 되는 다른 좋은 생각에 과감히 ‘노’라고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1000개나 되는 대안의 대부분을 버리고, 선택된 것에서부터 다시 시행착오를 쌓아가야 혁신적 결과물이 얻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혁신의 과정을 이끌어야 할 리더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최적의 트랜지스터 배열과 기묘한 안테나 침의 모양이 만들어진 것은 이 설계팀의 리더가 천재라서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가 단순하다면 리더가 이미 답을 대충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는 교과서와 경험에 기대어 하향식으로 설계하건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상향식으로 설계하건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복잡할수록 가능한 해답의 대안은 사실상 무한대가 될 수밖에 없다. 교과서에 실린 제한된 지식이나 리더의 경험 밖에 해답이 존재할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그래서 복잡하고 도전적인 문제일수록 리더는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더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도전적 문제를 과감히 제기하고 다 같이 힘을 모아 더 많은 실험을 해보고, 끈질기게 진화해 나가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팀 하포트는 리더가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으로 ‘신 콤플렉스(God Complex)’를 든다. 리더는 흔히 답을 주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능력 없는 리더로 취급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결국, 자신이 가진 제한된 정보와 경험, 배웠던 교과서의 논리로 해답을 제시하려 하고, 구성원들이 그대로 구현할 것을 다그치며, 실패하면 화를 낸다. 그 결과는? 구성원 모두가 리더의 답을 기다리고, 답을 내놓지 못하거나 틀리면 리더를 비난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 리더는 신이 아니다.

중국 대약진운동의 실패

하나의 정답을 기획해서 내려주는 하향식 설계의 문제는 국가정책을 구상할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1959년에서 1961년의 짧은 기간 동안 적어도 2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대약진 운동도 선의의 의도를 가진 정부의 하향식 정책설계가 얼마나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답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정부가 예측과 계획을 정교하게 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래서 하나의 정답을 교조적으로 열심히 밀어붙일수록 재앙적 결과가 올 가능성이 커진다. 이게 유일한 해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는 국가란 존재가 너무 복잡하고 동적이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에 한국 정부는 탁월한 예측과 계획능력으로 전례 없는 추격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가 비교적 단순했고, 선진국의 모범사례라는 정답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하향식 설계가 잘 통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가경제의 규모와 기술의 수준은 천재적인 누군가가 답을 내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만이 아는 기막힌 정책방안이 있다고 말하는 정책 결정자는 필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위험한 사람이다. 오히려 마법 같은 해답은 없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다양한 정책안을 실행해보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 같이 정책을 진화시켜나가자고 겸허하게 말하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 기업의 리더나 정부의 정책결정자 모두 ‘신 콤플렉스’를 떨쳐버려야 혁신이 살아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