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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어는 자유였다…윤석열 정부, 그 5년을 담아낸 키워드 셋 [나태준 한국정책학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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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엄한 통제가 이루어진 주변 분위기와는 달리,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는 국회의사당 야외광장은 분주하지만 평화로웠다. 행사장에는 위풍당당행진곡이 계속 흘러나왔고, 파란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어대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흡사 대학교 야외졸업식장을 방불케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단상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단상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단상 위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 내외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였다.

마침내 청중 사이를 걸어서 무대로 오른 윤 대통령은 감색 정장에 무늬 없는 옅은 푸른색 타이 차림이었다. 평화와 번영, 열린 자세를 상징하는 무난한 선택이었다. 공인으로서 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부침과 대통령 후보로서 경선 기간 동안 치른 고된 경험이 대통령으로서 지녀야 할 중립적 가치와 태도가 가지는 미덕을 이미 잘 알려주었으리라.

취임사 역시 구체적인 메시지나 정책공약을 담기보다는 5년간의 긴 여정을 앞두고 출발선에 선 새 대통령으로서의 전반적인 국정운영 방향의 언급에 무게를 두었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대통령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역대 대통령들의 십팔번인 민생경제문제를 딱히 앞에 내세우지도 않았다. 새롭게 조어한 어휘를 선보이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문장이나 단어로 치장하지도 않은 담백한 편이었다. 그런 중에도, 몇 가지 키워드가 귀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자유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이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 취임사 전반부를 통째로 할애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자유민주주의, 자유의 가치, 자유로운 시장, 자유시민, 자유와 인권 등으로 변주하였다. 청중들의 반응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겠다는 대목에서 가장 뜨거웠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고 했던데 반대했던 국민들의 숨겨둔 속내가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취임사 내용대로 자유는 보편적 가치이지만, 이를 유독 강조함으로써 새삼스러운 의미로 다가왔다.

두 번째 주목할 키워드는 사회 갈등 해소 방법으로서의 과학기술 혁신이다. 양극화와 사회갈등이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취임사 대목은 누구나 공감할만하다. 최근 KBS가 보도한 여론조사에서도 향후 5년간 갈등 줄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지,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 문제를 “도약과 빠른 성장”으로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방법론으로 과학과 기술, 혁신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사실 과학기술과 혁신은 이전 대통령들도 취임사에서 단골로 거론되던 단어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과학기술 입국을 천명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미래로 가는 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유세 기간 내내 유독 ICT와 디지털 전환, 플랫폼 정부를 강조해왔던 점을 떠올린다면 새 정부에서는 과학기술의 투자와 활성화를 통해 실제로 많은 경제·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기대를 걸만하다. 단지,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모든 길은 디지털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혁신 역시 과거 대통령들이 빠짐없이 거론했던 키워드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정부3.0 혁신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사회적 가치 혁신이 사실상 알맹이가 부족해 실패했던 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새 정부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혁신, 혁신을 통한 경제성장,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발전과 국제리더십 확보의 유기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 키워드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진단하고 있는 “반지성주의”인데, 이 대목은 당연한 듯하면서도, 애매모호한 의미도 지니고 있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취임사에 따르면,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조정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백번 맞는 말이다. 이러한 지성주의의 추구가 데이터와 통계 등 근거에 기반한 정책(evidence-based policy)으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그동안, 버젓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진실을 호도하고 초점을 흐리는 정치논리와 힘의 논리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를 바로 잡겠다는 의미라면 대환영이다.

취임사를 통해 대통령은 자신의 비전과 포부를 밝힌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을, 국민이 주인인 정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통한 선진국가의 꿈을 실현하고자 선진화 원년을 선포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 경제부흥 국민 행복 문화융성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수준으로 도약하고자 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였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다고도 했다. 과거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으로 남긴다.

과거 대통령들은 다하지 못한 숙제를 새 대통령에게 넘긴다. 교육개혁, 빈부 격차, 부동산, 북핵과 같은 오래된 숙제가 그것이다. 게다가 기후변화, 팬데믹 극복, 공급망 위기, 세계질서 재편과 같은 새로운 숙제까지 더해졌다. 지난 1월 한국정책학회가 주최한 대통령후보자 초청 토론회에서 윤석열 당시 후보자에게 어떤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질문했다. 국가발전에 주춧돌 하나 얹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 우리가 직면한 새롭고 오래된 문제들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취임식 도중에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새로운 국민의 나라”에 대한 우리 모두의 기대를 대변한다.

나태준 교수(연세대, 한국정책학회장)

나태준 교수(연세대, 한국정책학회장)

나태준 (연세대학교 교수, 한국정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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