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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평평하지도, 가깝지도 않은 세계화 4.0이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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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요동치는 자유무역 시대 

세계 하나로 연결한 세계화 3.0 쇠퇴 #미·중 대립 이어 서방·러시아도 대립 #신냉전 계기로 미 대외 정책 바뀌며 #공급망 흔드는 경제 합종연횡 활발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2005년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세계화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했다. 세계화 1.0(1491~1800), 세계화 2.0(1800~2000), 세계화 3.0(2001년 이후)이다. 당시 한국에서도 세계화(Globalization)는 큰 화두가 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거듭 강조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프리드먼의 분류에 따르면 세계화 1.0은 대항해 시대에 따른 국가의 세계화였고, 세계화 2.0은 해외로 진출한 기업의 세계화였고, 세계화 3.0은 인터넷으로 연결된 개인의 세계화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이 프레임에 세계화 4.0을 추가할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화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시각을 연이어 내보내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에 이어 코로나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는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화에 균열이 왔다고 보는 시각이다. NYT는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세계화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고)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시각을 종합하면 지금은 기존의 세계화 3.0이 막을 내리고 세계화 4.0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 3.0은 미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중국을 받아들이면서 본격화했다. 미국 기업을 필두로 자유 진영 국가들이 앞다퉈 중국으로 달려가 공장을 짓고 제품을 생산했다. 세계가 평평하고 가까워졌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만큼 성장하면서 세계화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에 진출한 자국 기업의 유턴을 촉구하고 전략물자의 국내 생산에 나섰다.

엔화의 추락, 세계화의 유탄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가 미국 및 유럽연합(EU)과 대립하게 된 것은 기존 세계화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계화를 거치면서 일어난 거대한 지각변동을 표면화한 계기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의 가장 큰 격변은 중국의 급부상과 함께 일본이 2010년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결국 세계화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가 된 셈인데, 엔화의 추락은 그 결정판이다. 최근 엔화는 추풍낙엽처럼 힘을 잃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가파른 엔화값 하락이 멈출 것 같지 않다”고 전망했고, FT는 “엔화값이 떨어질 때 나타나던 (수출 증대 같은) 긍정적 효과가 사라지면서 일본 경제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엔화는 1985년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당 250엔에서 80~90엔 수준까지 인위적으로 가치를 끌어올렸던 적이 있다. 이때부터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평가되면서 세계 경제가 요동칠 때마다 강세를 보였다. 그럴 때마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에 불리한 엔화 강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엔고(高)를 버티기 어려운 일본 기업들이 지난 수십 년 세계화 바람을 타고 해외로 몰려나가야 했다. 반대로 엔화가 가끔 약세를 보이면 일본 기업에 수출 호재가 되고는 했다. 하지만 이런 양상이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엔화가 약세를 보일수록 원자재와 수입물가 상승으로 일본 기업과 국민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130엔까지 하락한 엔화값이 150엔까지 추락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고 했다. 다만 FT는 실낱같은 반전 시나리오 한 가지를 제시했다. 지금처럼 엔화값이 계속 약세를 보이면 지난 30여년 일본 경제를 괴롭혀 온 디플레이션 탈출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엔화의 추락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은 제조업에서 한국·중국에 덜미를 잡혔고, 4차 산업혁명에서도 별다른 비교우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가부채가 너무 많아 물가와 함께 금리가 뛰면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크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 역시 “현재의 강력한 금융완화를 끈기 있게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수입물가가 오르고 있지만, 일본의 소비자물가 지수가 2%를 목표로 하는 인플레이션 타깃에는 여전히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경제 안보로 무역장벽 높아져

 남태평양의 솔로몬제도는 최근 미·중 전략경쟁의 각축장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최근 3년을 공들인 끝에 지난달 솔로몬제도와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NYT는 “협정 초안에 따르면 중국의 병력 및 군함 진출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솔로몬제도는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고, 중국은 남태평양 진출이 필요한 만큼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은 중국의 남태평양 진출에 비상이 걸리면서 솔로몬제도와 함께 피지·파푸아뉴기니 등 태평양 도서국에 대한 관리에 나섰지만, 마땅한 '당근'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결국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화되면서 총성 없는 경제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미·중의 이해 충돌로 WTO가 유명무실해지면서 통상질서는 합종연횡이 한창이다.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이 올해 발효됐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TP)이 출범을 앞두고 있다. 이들 두 ‘메가(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의 출범은 결과적으로 미국 주도의 WTO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중국이 주도권을 쥐는 계기로 떠오르고 있다. 본격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당시 CPTTP 불참을 선언하고 RCEP는 처음부터 중국이 주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로 반격에 나서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처음 구상을 발표한 뒤 최근 대상 국가와 논의 분야가 구체화하고 있다. NYT 등 미국 언론을 종합하면, IPEF에는 미국을 비롯해 한국·호주·일본·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뉴질랜드 등이 참여국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경제 공동체의 핵심은 새로운 공급망 구축이다. 디지털 경제와 기술 규범, 탈탄소청정에너지, 조세 및 반부패를 핵심 의제로 포함하고 있다. 중국이 주도권을 쥐게 된 RCEP과 중국이 가입을 추진 중인 CPTTP가 기존의 전통적인 무역에 무게를 두었지만, IPEF는 디지털 경제와 경제안보에 방점을 찍고 미국 중심의 공급망과 기술 규범을 중시한다.

퍼펙트 스톰에 직면한 한국 경제

 글로벌 경제 환경이 급변하면서 한국은 점점 더 어려운 대외 무역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미·중 패권 경쟁 가열에 따른 자유무역 위축 여파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경제안보가 중시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앞다퉈 자국의 핵심 전략물자 통제를 강화하고, 반도체의 경우 미국·일본·유럽연합 모두 자체 생산 강화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일 반도체 협력을 위해 최근 미국을 방문한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일본 경제산업상은 “30년 전 반도체 마찰을 빚은 미·일이 (중국 때문에) 다시 협력에 나선 건 기묘한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 중· 러도 대응수위를 높이고 있다. FT는 “중국은 최근 미국이 언제든 금융 분야에 대한 제재를 가해올 수 있다고 보고 자국 은행에 자산 보호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제재 동참국에 상품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하는 보복 제재 방안에 서명했다”고 FT가 전했다. 조만간 밝혀질 제재 명단에 한국이 포함되면 피해가 예상된다. 한국과 러시아의 무역 비중은 크지 않다. 하지만 나프타부터 유·무연탄과 철강, 반도체 소재 등 원자재와 수산물에 대한 의존도는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 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충격도 한국을 덮치고 있다. 오히려 일본은 디플레이션 때문에 여전히 제로금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미국 금리 인상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4월 소비자물가는 13년 6개월 만에 최고 수준인 4.8%를 기록했다. 이에 금리 인상이 가시화하면서 1862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은 가계는 이자 폭탄 세례를 맞고 있다. 4년째 재정적자가 이어지는 와중에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지난해 12월부터 무역수지 적자가 거듭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전례 없는 퍼펙트 스톰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