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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옥과 혼수(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웨스트 마크가 펴낸 『인류 혼인사』를 보면 결혼반지는 신랑ㆍ신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 손을 마주 잡거나 또는 두손을 묶는 의식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문명인으로서 반지를 결혼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이집트인 이었다.
고대 로마인들도 결혼반지를 사용했지만 값비싼 금은보석이 아니라 쇠로 만든 것이었다.
결혼반지에 보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세기 무렵부터인데 그것은 신부를 사고 파는 매매혼의 풍속이 반지를 교환하는 관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결혼반지와는 달리 신부에게 지참금 등 한살림 밑천을 주어 보내는 풍속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미개사회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고 오늘날에도 그 폐습이 존속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기록인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고구려의 혼속은 색다르다. 양가에서 혼인이 결정되면 신부집에서는 뒷마당에 서옥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는다. 그러면 신랑이 신부집을 찾아와 문전에 엎드려 신부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허락이 나면 두 사람은 그 서옥에 들어가 일정기간 동거를 한다.
이때 신랑집에서는 고기와 술은 물론 돈주머니까지 싸들고 간다. 그러고도 3∼5년 동안 신부집에서 노역으로 신부값을 치른 다음에야 처가에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말에 『장가간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고 국문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신부를 귀하게 여기는 풍속은 조선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시대처럼 처가살이는 없어졌지만 신랑집이 신부집에 보내는 함속에 으레 고급비단과 값비싼 패물 등을 넣었다. 이 호화혼수 풍조가 극심해지자 연산군때는 민가에서 함들이는 날을 신고하게 하여 궁중의 의녀로 하여금 그것을 검사하게까지 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호화혼수의 폐습이 요즘은 역전현상을 보여 신랑쪽에서 아파트와 자가용,심지어는 신랑 어머니의 밍크코트까지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혼수 때문에 자살소동까지 빚어내는 세태다. 물질위주의 사고방식은 이제 결혼도 하나의 「거래」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아직도 미개사회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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