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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앞선 발자국이 없다, '축적의 시간' 이후 한국이 나아갈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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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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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질문
이정동 지음
민음사

‘화두’(話頭).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 문제를 말한다. 불가가 아니라도 화두를 잡는 일은 모든 일에 앞서 해야 할 일이다. 응축된 화두는 핵심을 찌르고, 깨달음을 통해 문제를 풀어낼 수 있기 때문. 2015년 한국사회에 『축적의 시간』이란 화두를 던졌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가 다시 ‘뼈를 때리는’ 화두를 던졌다. 『최초의 질문』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가 6·25 전쟁 이후 폐허의 땅 위에서 시작해 1인당 GDP 3만 달러 시대까지 달려오며 이뤄낸 발전은 말 그대로 '축적의 시간'이 있어 가능했다. 대한민국호가 지금껏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 성공한 비결이기도 하면서, 앞으로 선도자(first mover)로 진화하기 위한 자격이기도 하다.

저자가 던진 다음 화두 ‘최초의 질문’은 대한민국이 퍼스트무버 국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신을 압축한 표현. 빠른 추격자는 앞서간 퍼스트무버를 묵묵히 성실하게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 유교 문화가 근간을 이룬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이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퍼스트무버의 자리는 성실함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

세계사에 유례없이 빠른 추격자로 성공한 한국은 이제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雪原), 즉 화이트 스페이스(white space)에 들어섰다. 과거 한국의 산업과 기술은 선진국의 발자국이 뚜렷이 찍혀있는 눈밭을 걸었다. 하지만 앞선 발자국이 더는 없는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도 하지 않은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한 걸음 디뎌 지도를 업데이트하고, 방향을 수정하며 길을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다.

인텔이 반도체 제국을 이루는 데는 저마다 기능이 다른 칩들을 통합할 수 있겠냐는 최초의 질문이 있었다. 우주 시장의 개척자로 불리는 스페이스X에는 1단 로켓을 재사용할 수 있겠냐는 최초의 질문이 있었다. 저자는 ①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을 제기하고 ②그에 대한 답을 찾아 작은 것에서부터 버전을 빠르게 높이는 스몰베팅, ③최초의 답을 위해 외부의 지식과 시각을 도입하는 오픈 네트워킹, ④시행착오의 경험을 쌓아가는 축적 시스템, ⑤매 단계의 철저한 실행을 통해 기술혁신이 완성된다고 정리한다.

한국 사회는 최초의 질문을 잘할 수 있는 사회일까. 아쉽게도 아니다. 저자는 수년 전 막내의 시험공부를 보고 깜짝 놀란 경험을 전한다. “포항, 과메기, 포항, 과메기…‘라고 중얼거리길래 뭘 하는지 물어보니 한국지리 교과 내용을 암기하는 중이란 답이 돌아왔다. 스마트폰으로 10초면 찾을 지식을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젊은 인재들이 기술혁신에 너도나도 뛰어들 수 있도록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을 던질 기회를 제공하고 시행착오를 보듬어주는 사회적 환경이 절실하다’. 책의 말미에 저자가 기술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는 한국 사회에 호소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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