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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코스, 더 악명높은 협곡...고진영 진흙샷은 옳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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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바랑카에서 샷을 하는 고진영. [AFP=연합뉴스]

바랑카에서 샷을 하는 고진영. [AFP=연합뉴스]

LPGA 투어 디오 임플란트 LA 오픈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윌셔 컨트리클럽엔 회원들이 바랑카(협곡)라고 부르는 개울이 흐른다. 어른 키보다 높은 이 개울은 여러 홀에 걸쳐 있다.

"첫샷은 해 볼만, 두번째 샷은 참았어야" #고진영 잔인한 4월 #34연속 언더파 기록 깨진 후 부진 #짧은 거리에서 4퍼트 등 불운 이어져

높이는 악마의 코스라고 부르는 스코틀랜드의 커누스티 골프장의 악명 높은 베리의 번(개울)과 흡사하다. 오거스타 내셔널 아멘코너를 휘감는 래의 개울보다 무서운 곳이다.

24일 열린 3라운드 17번 홀. 공동 선두를 달리던 고진영(27)의 샷이 하필 그리로 들어갔다. 고진영이 바랑카에 들어가 있는 모습은 1999년 커누스티에서 열린 디 오픈 마지막 홀 배리의 번에 공을 빠뜨리고 고민하는 장 방드 벨드가 연상됐다. 방드 벨드는 마지막 홀 3타 차 선두를 달리다 역전패했다.

고진영은 볼을 그대로 치기로 마음먹었다. 첫 샷은 벽 상단을 맞고 다시 내려왔다. 다시 한번 진흙 위에서 온그린을 시도했으나 역시 벽에 걸려 떨어졌다. 이후 고진영은 바랑카에서 나와  페널티 구역 밖에 드롭해 6번째 샷을 그린에 올렸다. 2퍼트로 쿼드러플 보기가 됐다.

스코틀랜드 카누스티 골프장의 배리 번(개울). [AP=연합뉴스]

스코틀랜드 카누스티 골프장의 배리 번(개울). [AP=연합뉴스]

고진영은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아 4라운드를 기약했다. 경기 후 고진영의 발언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오늘 나쁘지 않은 플레이였고, 단지 17번 홀에서만 큰 실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골프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17번 홀에서 큰 일을 겪고도 마지막 홀 버디를 잡은 건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크다"라고 말했다.

17번 홀 바랑카에서의 샷 선택은 옳은 걸까. 박원 JTBC골프 해설위원은 “앞에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 LPGA 선수라면 누구나 쳤을 것이다. 뒤땅 안치고 정확히 치길 원했을 텐데 타이트한 라이에다 미끄러운 곳이어서 원했던 만큼의 콘택트가 안 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두 번째 샷은 스탠스와 라이가 더 나빠 잘 칠 확률이 더 떨어지는 곳이었는데 실수가 나온 이후 심리적으로 당황한 상태라 캐디가 말리는 게 나았을 것 같다”고 평했다.

고진영. [AFP=연합뉴스]

고진영. [AFP=연합뉴스]

한희원 JTBC골프 해설위원도 비슷하게 봤다. 한 위원은 “첫 번째 샷은 대다수 선수가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거다. TV로 볼 때 느끼는 것보다 공간이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벽 거의 윗부분에 맞고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 샷은 내리막 라이였고 어려웠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하체가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는 라이에서 볼을 깔끔하게 쳐내려다 보니 큰 근육을 쓰기보다는 양팔 움직임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고, 아웃사이드 인으로 내려와 맞을 가능성이 커지고, 그만큼 로프트 각도가 세워져 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고진영에게 올해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지난 1일 벌어진 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대회인 셰브런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2오버파 74타를 치면서 지난해 7월 에비앙 챔피언십 4라운드부터 8개월여 이어온 34라운드 연속 언더파 행진이 끝났다.

당시 고진영은 “이제 짐을 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속 기록을 세우는 선수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야구에서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이나, 축구에서 연속 골 기록을 세우는 선수는 부담감 속에서 경기한다.

연속 기록 숫자가 늘수록 마음의 짐은 무거워진다. 고진영은 안니카 소렌스탐의 31경기를 넘어 34라운드 연속 언더파를 쳤으니 매우 힘겨웠을 것이다.

바랑카 위 다리를 걷고 있는 고진영. [AP=연합뉴스]

바랑카 위 다리를 걷고 있는 고진영. [AP=연합뉴스]

고진영은 셰브런에서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위로는 실망스러운 공동 53위에 그쳤다.

스윙 점검을 위해 2주를 쉬고 고진영은 디오 임플란트 LA 오픈에 참가했다. 첫날은 이븐파로 평범했지만 22일 열린 2라운드에 진짜 고진영이 나왔다. 난코스에서 7언더파 64타를 치고 공동 선두에 올랐다.

3라운드 15번 홀까지 버디 3개를 잡아 공동 선두였다. 16번 홀이 분수령이 됐다. 포대 그린 아래에서 친 범프앤드런 샷이 아슬아슬하게 그린 위에 멈췄다가 다시 굴러 내려왔다.

한두 바퀴만 더 굴렀다면 핀 옆에 붙을 샷처럼 보였다. 고진영은 다음 샷을 그린에 올리고 만만치 않은 거리의 보기 퍼트를 넣었다. 그러나 17번 홀 바랑카에서 쿼드러플 보기로 밀려났다.

25일 열린 최종라운드 고진영과 선두 하타오카 나사와는 5타 차이였다. 작지 않은 타수 차이지만 고진영이니까 따라갈 수 있는 스코어이기도 했다.

첫 홀 보기로 시작했다. 고진영은 파3인 7번 홀에서 버디 기회를 잡았다. 2m 정도의 내리막 퍼트였으나 너무 약했다. 파 퍼트는 다소 급했다.

공은 홀 옆을 스쳐 갔고 보기 퍼트마저 홀을 외면했다. 버디 기회에서 4퍼트로 더블 보기가 됐다. 고진영은 버디 1개와 보기 3개, 더블 보기 1개로 4오버파, 합계 2언더파 공동 21위에 그쳤다.

우승자인 하타오카 나사. [AFP=연합뉴스]

우승자인 하타오카 나사. [AFP=연합뉴스]

고진영이 좋은 성적을 내던 코스라서 아쉬움은 더 컸다. 고진영은 이전까지 이 대회에 세 번 참가해 2위, 5위, 3위를 했다.

하타오카 나사(일본)가 15언더파로 우승했다. 박인비(34)는 7언더파 공동 3위, 강혜지(32)와 최운정(32), 김세영(29), 최혜진(23)은 나란히 6언더파 공동 6위에 올랐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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