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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그린, 일본엔 사사키…한국의 '160㎞ 투수' 가능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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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속구'가 다시 화두다. 올해 메이저리그(MLB)에 데뷔한 투수 헌터 그린(23·신시내티 레즈)은 지난 17일(한국시간) LA 다저스전에서 시속 100마일(약 161㎞)이 넘는 공을 39개나 던졌다. MLB가 투구추적시스템(PTS)으로 구속을 측정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한 경기 최다 기록이다. 제이컵 디그롬(뉴욕 메츠)이 지난해 6월 6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 기록한 33개를 1년도 안돼 뛰어넘었다. 이날 그린의 최고 시속은 164㎞, 직구 평균 시속은 159㎞이었다.

같은 날 일본 프로야구(NPB)에선 사사키 로키(21·지바롯데 마린스)가 최고 164㎞, 평균 158㎞의 직구를 앞세워 17이닝 연속 퍼펙트를 달성했다. 8회가 끝난 뒤 교체돼 세계 최초의 2경기 연속 퍼펙트게임은 이루지 못했지만, 포크볼이 140㎞대 중반까지 나오는 괴력을 뽐내 전 세계 야구팬을 들썩거리게 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이들처럼 시속 160㎞ 강속구를 자유자재로 던지는 투수가 나오지 않았다. 단국대에서 투수 역학 박사학위를 딴 최원호 한화 이글스 퓨처스(2군) 감독은 "MLB와 NPB는 역사와 인프라, 노하우 면에서 KBO리그와 격차가 있다"며 "머지않아 한국에도 나타나겠지만,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고 했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안우진(키움 히어로즈), 문동주(한화 이글스)의 비시즌 훈련을 담당하는 54K 스포츠 야구전문센터의 김광수 코치도 "미국, 일본처럼 선수 풀이 넓어야 천재형 유망주를 발견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최근 공 빠른 젊은 투수가 많아진 건,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이후 좋은 유망주들이 야구로 많이 몰렸기 때문"이라며 "요즘엔 학생 야구선수가 줄어드는 추세라 앞으로 '160㎞ 투수'를 볼 확률이 더 줄어들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투수의 구속은 대표적인 '재능'의 영역이다. 전문가들은 후천적 노력으로 늘릴 수 있는 구속의 범위를 시속 5㎞ 안팎으로 여기고 있다. 시속 140㎞를 던지던 투수가 145㎞까지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150㎞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김광수 코치는 "구속은 80%가 타고난 신체 능력에 달려 있다. 그 외에 좋은 지도자의 코칭이 10%, 적절한 웨이트트레이닝이 5%, 선수 개인의 잠재력과 노력이 5% 정도 작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KBO 공식 기록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 측정 기준으로 올 시즌 최고 구속(시속 157.53㎞)을 기록한 키움 안우진. [뉴스1]

KBO 공식 기록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 측정 기준으로 올 시즌 최고 구속(시속 157.53㎞)을 기록한 키움 안우진. [뉴스1]

국내 투수 중 시속 160㎞에 가장 근접한 후보는 안우진이다. 그는 2020년 10월 17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고척스카이돔 전광판에 시속 160㎞를 찍었다. KBO 공식기록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가 PTS로 측정한 이 공의 시속은 157.44㎞였다. 안우진은 올해 이보다 더 빠른 공도 던졌다. 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 1회 안치홍 타석에서 던진 2구째 직구가 시속 157.53㎞(전광판엔 159㎞로 표출)를 기록했다. 안치홍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이 공에 배트를 내지 못했다.

아직 프로 데뷔전을 치르지 않은 문동주와 심준석(덕수고)도 기대감을 키운다. 문동주는 지난달 스프링캠프 불펜피칭에서 시속 155㎞ 강속구를 던진 특급 유망주다. 고교 3학년인 심준석은 2학년인 지난해 최고 157㎞을 찍어 화제를 모았다. 셋 다 키 1m90㎝ 안팎의 장신이다.

최원호 감독은 이들의 160㎞ 도전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운동 역학자들은 근력의 정점을 20대 중반으로 본다. 그 시기 이후에는 운동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근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라며 "반대로 생각하면 20대 초반 선수들은 발전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 아주 드물지만, 오동욱(한화), 이혜천(전 두산)처럼 프로에 와서 시속 10㎞ 이상 공이 빨라진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7일 LA 다저스전에서 시속 100마일(약 161㎞)이 넘는 공 39개를 던져 제이컵 디그롬(33개)을 넘어선 신시내티 투수 헌터 그린. [USA 투데이=연합뉴스]

지난 17일 LA 다저스전에서 시속 100마일(약 161㎞)이 넘는 공 39개를 던져 제이컵 디그롬(33개)을 넘어선 신시내티 투수 헌터 그린. [USA 투데이=연합뉴스]

실제로 그린은 2017년 신시내티에 지명된 뒤 지난해까지 마이너리그에서 경험을 쌓았다. 2018년엔 팔꿈치 수술도 받았다. 입단 5년 만인 올해 빅리그에서 광속구를 뿌리고 있다. 사사키도 2020년 입단 후 1년간 2군에서 제구를 다듬고 프로에 적합한 몸을 만들었다. 지난 시즌 11경기에 등판한 뒤 3년 차인 올해 진짜 '괴물'로 도약했다. 안우진도 입단 당시보다 최고 구속이 4㎞ 가량 늘었다. 김광수 코치는 그 비결로 '벌크업'을 꼽았다. "체중과 스태미너는 구속에 중요한 요소다. 안우진은 지난 겨울 몸을 키웠고, 부상 방지를 위해 어깨와 팔꿈치 강화 훈련을 병행했다"고 귀띔했다.

물론 좋은 투수의 기본은 커맨드(마음먹은 대로 공을 던지는 능력)다. 최원호 감독은 "투수의 기술 중 1번은 구속이 아니다. 공을 던질 줄 아는 선수가 스피드를 늘려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2011년 이후 국내 투수 비공인 최고 구속(시속 158.68㎞)을 기록한 최대성은 11시즌 동안 244와 3분의 1이닝만 던지고 은퇴했다.

안우진이 올해 키움의 에이스가 된 것도 단지 공이 빨라서만은 아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제구와 구종 선택, 경기 운영이 투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구속에 대한 욕심이나 관심은 그 다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광수 코치 역시 "미국과 일본에 시속 160㎞를 던지는 투수는 많다. 디그롬이나 사사키처럼 컨트롤이 되는 투수여야 그 공으로 빛을 보는 것"이라며 "학생 선수가 기본기를 갖추기도 전에 공만 빠르게 던지려다 부상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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