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16세기 들어 국부 증강, 해양제국 건설 꿈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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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본은 어떻게 강대국이 됐나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임진왜란 때 일본 측 요구는 명나라에 볼일이 있으니 길 좀 빌려달라는(가도·假道) 것이었다. 이 요구를 흔히 지어낸 핑계로 본다. 조그만 섬나라가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주장 자체가 황당해 보이기 때문에 실제 욕심은 조선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명나라 정벌의 뜻이 정말로 있었다. 명나라를 몰아낸 후 일본 천황이 북경에서 천하를 다스리게 하고 관백(關白)인 자신은 영파(닝보·寧波)에 자리 잡고 천축(天竺)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왜 영파였을까? 지금은 부성급(副省級) 주요 도시지만 당시에는 하나의 주급(州級) 지방도시였을 뿐인데.

영파가 16세기 초까지 일본 조공선의 기항지였고, 그 후에는 왜구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영파는 외부를 향한 창문과 같은 곳이었다. 히데요시의 꿈은 대륙의 제국 탈취를 넘어 해양제국 건설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과 은 밀거래로 경제력 키워
인도~마카오~일본 3각무역 활기

포르투갈이 전해준 총기도 개량
중 천하제국 본딴 ‘소천하’ 목표

일본통일 이룬 막부 비폭력 추구
이웃 나라 섣부른 단정 경계해야

히데요시의 꿈은 ‘왜구(倭寇)제국’

오다 노부나가의 패권을 성립시킨 나가시노 전투(1575)의 병풍 그 림. 포르투갈이 전해준 뎃포(鐵砲)가 승부를 갈랐다. 왼쪽의 오다군이 방책을 따라 포수 대열을 배치하고 오른쪽 다케다군 기마대를 저지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다 노부나가의 패권을 성립시킨 나가시노 전투(1575)의 병풍 그 림. 포르투갈이 전해준 뎃포(鐵砲)가 승부를 갈랐다. 왼쪽의 오다군이 방책을 따라 포수 대열을 배치하고 오른쪽 다케다군 기마대를 저지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중국 서남방의 해양세계를 일본인이 천축으로 생각한 것은 1549년 일본 선교를 시작한 프란시스 사비에르(1506~1552)가 인도의 고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비에르의 통역 안지로가 기독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교의 본산 ‘천축’에서 왔음을 강조했다.

안지로는 또한 하느님을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일본말 ‘다이니치’로 표현할 것을 권해서 사비에르도 받아들였다가 2년 후 폐지했다. 일본인이 익숙한 관념에 의탁하는 것이 최초의 접촉에는 편리한 점이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기독교의 본질을 가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안지로는 최초의 일본인 기독교인이었지만 ‘천축’을 강조하고 ‘다이니치’를 표방한 것을 보면 머릿속은 불교로 가득 차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회 창립멤버의 한 사람 사비에르는 유럽인의 새 활동 영역인 동방세계 선교에 뜻을 두고 1542년부터 인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547년에 그를 찾아온 안지로에게 일본의 풍속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 선교를 결심했다. 일본인의 품성이 기독교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교역과 교통의 상황도 고려했을 것이다.

안지로가 사비에르를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살인죄로 도피행각에 나선 사쓰마의 하급무사 안지로가 중국 남해안으로 간 것은 왜구가 되기 위한 표준 코스로 보인다. 그런데 사비에르의 존재를 알게 되자 2년간 찾아다닌 끝에 그를 만나 그 안내자가 됐다. 안지로는 사비에르의 선교사업을 해적활동의 새로운 유형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포르투갈 배 정기적으로 왕래

‘주신구라’는 에도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화(史話)다. 가부키부터 텔레비전 시리즈까지 많은 작품으로 나왔다. 원수의 집에 침입하려는 사무라이들을 그린 판화. [사진 위키피디아]

‘주신구라’는 에도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화(史話)다. 가부키부터 텔레비전 시리즈까지 많은 작품으로 나왔다. 원수의 집에 침입하려는 사무라이들을 그린 판화.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에 포르투갈인이 처음 나타나 화승총을 전해준 것이 1543년이었다. 접촉이 시작되자마자 포르투갈 배의 일본 기항이 잦아진 사실은 안지로의 행적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1545년 그가 가고시마에서 탄 포르투갈 배는 원래 계획했던 것과 다른 배였고, 그 배 선장이 사비에르와 잘 아는 사람이어서 사비에르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포르투갈인의 일본 왕래가 잦아진 것은 교역의 중요한 열쇠를 그곳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바로 은(銀)이다. 포르투갈인은 1510년대에 남중국해 해역에 들어와 중국 교역을 시도했지만 중국에 팔 물자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 무렵 다량의 은이 산출되고 있었고 일본과 명나라 사이의 조공무역은 1523년부터 끊어져 있었다. 일본산 은의 중국 반입이 이른바 ‘후기 왜구’의 중심 사업이 됐고, 여기에 포르투갈인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일본에도 발길이 닿게 된 것이다.

사비에르가 일본에서 체류한 1549~1551년 기간 중 고아와 규슈 사이에 포르투갈 배가 정기적으로 왕래하기 시작했다. 1554년 포르투갈이 마카오 기지를 확보한 후에는 고아~마카오~나가사키 노선이 확정됐다. 이 배를 통해 일본의 은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종이와 비단을 비롯한 중국 상품이 일본으로 나왔다. 배는 포르투갈 배지만 유럽 상품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았고, 수익의 상당 부분이 선교사업에 쓰였다.

안지로가 ‘해외선교의 수호성인’ 사비에르를 왜구를 대신할 새로운 유형의 해적 수령쯤으로 생각했다 하더라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지로는 사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얼마 후 진짜 해적으로 나섰다가 중국 해안에서 죽었다.

1543년 포르투갈인이 전해준 총기가 일본에서는 ‘뎃포(鐵砲)’란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일본인은 바로 이것을 모방해 만들기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같은 시기 유럽보다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쓰게 되면서 일본의 전쟁 양상을 바꿔놓았다. 1592년 조선에 출병한 16만 명 병력 중 약 4만 명이 뎃포로 무장했다고 한다.

총기를 짧은 시간에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몇십 년 후 일본에서 총기 사용이 실질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1603) 이후 대형 전쟁이 없어지면서 총기 사용이 사라져갔다.

마테오리치가 감탄한 평화

인도 고아에서 사비에르가 설교하는 모습. 청빈과 순명을 표상하는 성자 모습이지만 일본에서는 영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전에 무척 공을 들이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인도 고아에서 사비에르가 설교하는 모습. 청빈과 순명을 표상하는 성자 모습이지만 일본에서는 영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전에 무척 공을 들이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없다 해서 총기의 효용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 1703년의 한 사건을 극화한 ‘주신구라(忠臣藏)’는 주군의 복수에 목숨을 건 47인 사무라이의 이야기다. 원수 한 사람 죽이는 데 목적을 둔다면 총기가 적합한 도구 아니었을까?

총기 사용이 “무사답지 못한 짓”이란 관념이 보인다. 이런 관념의 지배가 바로 ‘평화의 문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16세기 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이런 평화의 문화에 경탄했다. “병사든 군관이든, 문관이든 무관이든, 어느 누구도 시내에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다. (...)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나 폭력이라면 고작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일은 들어볼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 물러서는 사람이 점잖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일본이 센고쿠(戰國) 시대를 지나 도쿠가와 막부체제에 이른 것은 중국이 전국시대를 지나 천하제국을 이룬 것과 방불한 일이다. 통일을 이룬 지배세력은 새로운 도전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국내의 폭력 수준을 낮추는 데 힘썼다. 중화제국이 ‘천하’의 평화를 지키는 데 애쓴 것처럼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하나의 ‘소(小)천하’로 지킨 것이다.

일본의 폭력성에 대한 한국인의 인상은 두 차례 침략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웃 사람의 ‘인간성’이나 이웃 나라의 ‘국민성’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이웃 간의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기 쉽다. 폭력성이 나타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국력 첫 역전, 임진왜란 불러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총(鳥銃). 뎃포가 등장하며 더 강한 갑옷이 제작됐고, 더 강력한 뎃포가 개발되는 ‘군비 에스컬레이션’이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총(鳥銃). 뎃포가 등장하며 더 강한 갑옷이 제작됐고, 더 강력한 뎃포가 개발되는 ‘군비 에스컬레이션’이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어났다.

한국인이라면 일본을 특별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본을 조금 깔보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대륙의 선진문명을 섬나라에 전수해 준 반도국 입장에서 16세기 말과 19세기 말의 침략은 보편적 국제 도의 이전에 건방지고 배은망덕한 짓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반도와 섬의 지정학적 우열 관계는 불변의 원리가 아니다. 상황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금속문명 초기 단계에서 만주와 한반도 사이에도 역전이 있었다.

“금속기문명이 대륙으로부터 처음 전파되던 시절에는 대륙에 가까운 위치의 만주가 당연히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 고조선 수도의 남하, 부여에서 고구려의 파생, 고구려에서 백제의 파생이 모두 선진문명의 남진 현상을 보여주는 상황들이다. (...) 그런데 기원전 3세기 이후 중국 방면으로부터 철기를 바탕으로 한 집약적 농업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문명의 북고남저(北高南低) 상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온난한 기후의 한반도가 그 단계 농업문명의 정착에 더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김기협의 『밖에서 본 한국사』 34쪽)

만주와 일본에 대한 한반도의 경제적·문화적 우위는 1000년간 계속됐으나 13세기 후반 몽골 정복을 계기로 변화가 시작됐다. 미개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일본사회가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 15~16세기의 센고쿠(戰國)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통일에 이르렀다. 16세기 중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반도 국가를 추월했고, 그 결과가 임진왜란에 나타났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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