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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생선·달…삶을 응원하는 소박한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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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응노의 집에서 열리고 있는 이진경 작가의 개인전. [사진 이은주]

이응노의 집에서 열리고 있는 이진경 작가의 개인전. [사진 이은주]

충남 홍성의 용봉산과 월산 사이에 자리 잡은 낮은 들판. 이곳에 홍성의 명소가 있다. 고암(顧菴) 이응노(1904~89) 생가기념관 ‘이응노의 집’이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한 이곳이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이진경(54) 작가의 ‘먼 먼 산 - 헤치고 흐르고’ 전시 연계행사를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응노의 집’은 2011년 개관한 이래 작가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고암미술상을 제정하고 격년으로 시상해왔다. 제5회 수상자인 이진경 전시는 지난해 12월 개막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작가와 대화·천도재 등 행사가 미뤄지다 지난 2~3일 열렸다. 이 자리가 특별한 이유는 더 있다. 수상자가 자신의 전시를 이응노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위로하는 자리로 마련한 것. 뒤늦게나마 ‘이응노의 집’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더한 이 자리에는 건물을 설계한 조성룡 건축가(성균관대 석좌교수·조성룡도시건축 대표)도 참여했다.

‘충청’. [사진 이진경스튜디오]

‘충청’. [사진 이진경스튜디오]

조 석좌교수는 관객과 대화에서 “고암은 프랑스에 살면서도 늘 고향의 용봉산과 월산 얘기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고국을 그리워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파리에 묻혔다. 이 아름다운 땅에 고암을 모신다는 뜻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은 건물은 내부가 낮은 언덕길처럼 지그재그로 펼쳐진다. 그는 “이 건물은 가운데 홀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는 이곳을 사당이라고 생각했다”며 “이 안을 걸어 들어가며 관람객이 고암의 삶을 통해 우리 역사를 돌아보고, 또 고암의 뜻을 잇는 작가들에 의해 살아있는 전시장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진경의 전시는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3개 전시실을 자연, 역사, 전통 등 소주제로 나눴고, 그림부터 글씨, 오브제 등 작품 400여 점을 내놨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도, 매끈하게 정돈하거나 우아하게 연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벽 바닥부터 위까지 빈틈없이 작품을 다닥다닥 걸거나 붙였다. 벽 한쪽엔 ‘추어탕’이라는 대형 글자가 그의 독특한 서체로 쓰여 걸렸고, 이름 모를 식당 메뉴판도 작품으로 등장했다. 모두 친근한 손글씨 같은 ‘이진경체’다. 버들강아지와 달, 밥과 국수 그림이 유난히 많다.

‘달’. [사진 수류산방]

‘달’. [사진 수류산방]

전 쌈지 아트디렉터로도 유명한 이진경은 ‘쌈지체’라는 글자체를 만든 주인공. 무엇보다 그는 ‘미술=고급’이라는 개념에 저항하며 일상적이고, 쉽고, 젠체하지 않는 방식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형성해 왔다. 글씨와 그림을 넘나드는 작업은 환경, 생태, 문화, 정치 등 삶을 둘러싼 다양한 얘기를 다룬다. 이 작가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있는 미술을 상류 문화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연출된 집’, 즉 ‘마당 없는 집’과 같은 것”이라며 “내가 하고 싶은 미술은 꽃도 피고 연탄재도 있는 마당처럼, 우리가 경험한 역사와 삶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룡 건축가가 설계한 이응노의 집. 홍성 외곽의 낮은 산자락 끝에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는 “이응노의 사당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고 했다. [사진 건축사진가 김재경]

조성룡 건축가가 설계한 이응노의 집. 홍성 외곽의 낮은 산자락 끝에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는 “이응노의 사당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고 했다. [사진 건축사진가 김재경]

홍성군이 운영하는 이응노의 집은 10년간 잘 자라왔다. 고암미술상을 제정했고, 창작 스튜디오도 운영 중이다. 2019년부터는 고암학술연구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개관 10년이 되도록 여전히 군청 산하 '시설 사업소' 관할로 운영되는 것은 가장 아쉬운 점으로 지적된다. 조 석좌교수는 "이응노의 집은 상징성, 장소성, 공간 등 국내에 선도적인 인물기념관이 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음에도 독립 기관으로 차별화된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며 "앞으로 혁신적인 시스템과 운영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응노

이응노

이응노

충남 홍성 출신 미술가. 서화가 김규진 화백으로부터 수묵화 등을 배웠고, 20살 때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했다. 도쿄에서 유학한 뒤 홍익대·서라벌예대 교수로 일했다. 55세 때인 58년 서독에서 개인전을 열고 이후 파리에 정착했다. 60년대 후반 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반 옥살이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결국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89년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호암갤러리) 개막 직전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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