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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농인배우 감동 안긴 영화 ‘코다’의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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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남우조연상·각색상을 거머쥐며 3관왕에 오른 ‘코다(CODA)’는 장애인 예술사에 길이 남을 영화다. 극 중 농인 배역을 모두 농인 배우가 맡았다. 농인 배우의 현실적이고 섬세한 연기가 감동을 배가시켰고 작품성을 높였다. ‘코다’의 성공은 영국 매체 가디언의 28일 보도대로 “장애인 배우로는 수익을 못 낸다는 업계의 통념에 폭탄을 던졌다”고도 볼 수 있다.

‘코다’는 ‘청각 장애 부모에게 태어난 자녀(Child of Deaf Adult)’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단어다. 영화의 주인공인 17세 소녀 루비는 부모와 오빠가 모두 농인이다. 트로이 코처, 말리 매트린, 다니엘 듀런트 등 세 농인 배우의 ‘다름’과 특수한 경험이 영화 속에 녹아들었다. 특히 이들이 루비의 노래를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귀를 뺀 온몸으로 ‘듣는’ 장면은 관객들의 감정을 소용돌이치게 했다. 현실의 복잡한 상황과 갈등, 그리고 루비를 향한 깊고 깊은 애정이 이들의 표정과 몸짓으로 강렬하게 형상화됐다.

작품상 등 오스카 3관왕
LA 전문극단서 기량 닦아
국내서도 농인극단 시동
노희경 신작에 농인 배역

아카데미 3관왕을 차지한 영화 ‘코다’의 한 장면. 농인 배우 트로이 코처, 말리 매트린, 다니엘 듀런트(오른쪽부터)가 극 중 농인 역할을 연기했다. [사진 판씨네마]

아카데미 3관왕을 차지한 영화 ‘코다’의 한 장면. 농인 배우 트로이 코처, 말리 매트린, 다니엘 듀런트(오른쪽부터)가 극 중 농인 역할을 연기했다. [사진 판씨네마]

이들은 연기력은 어느 날 뚝딱 길러진 게 아니다. 27일(현지시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트로이 코처는 “배우로서 내 기량을 갈고닦을 수 있도록 받아주고 기회를 준 농인 연극계에 감사한다”며 수상 소감을 밝혔다. 코처가 주로 활동한 극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데프 웨스트(Deaf West Theatre)’다.

‘코다’에 출연한 세 농인 배우는 모두 데프 웨스트 작품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특히 루비의 오빠 레오를 연기한 다니엘 듀런트는 2015년 이 극단이 리바이벌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방황하는 10대 소년 모리츠 역을 맡아 그해 뉴욕포스트가 뽑은 ‘브로드웨이가 주목할 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농인 배우와 청인 배우가 함께 출연한 데프 웨스트의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2016년 토니상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을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데프 웨스트는 1991년 설립된 이래 3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와 협업했다. 농인과 청인 세계의 예술적 다리 역할과 농인 배우를 대중에게 알리는 통로 역할을 동시에 해냈다. 다음달엔 LA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 오페라 ‘피델리오’를 공연한다. 성악가의 노래와 농인 배우의 몸짓 표현을 함께 보여주는 무대다.

국내에도 농인 배우들이 활동하는 극단이 있다. 2018년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출발한 ‘핸드스피크’다. 극단과 댄스팀·영상팀·디자인팀 등으로 구성됐으며, 현재 극단에서 활동하는 농인 배우는 18명이다.

4월 19,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핸드스피크 극단의 ‘사라지는 사람들’. 농인 배우 7명과 청인 배우 6명이 함께 출연 한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4월 19,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는 핸드스피크 극단의 ‘사라지는 사람들’. 농인 배우 7명과 청인 배우 6명이 함께 출연 한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핸드스피크 극단은 2019년 뮤지컬 ‘미세먼지’를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했고, 2020년엔 연극 ‘사라지는 사람’을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선보였다. 모두 농인 배우의 수어와 청인 배우의 구어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사라지는 사람들’은 다음달 19,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다시 오른다. 이 연극의 박경식 연출은 “농인 배우들은 상대방을 보고 집중하며 소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는 무대에서 훨씬 아름다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연출 세계를 확장해준다”고 말했다. 영화 ‘코다’에서 농인 배우들의 구현해낸 것과 맥이 닿아있는 예술 세계다.

핸드스피크의 지난해 매출은 1억3000만원 정도다. 자립과 지속가능성이 여전한 고민거리다. 핸드스피크는 지난해 11월 ‘국제교류 예술워크숍’을 화상으로 진행하며 데프 웨스트의 데이비드 커스 예술감독을 만나기도 했다. 정정윤 핸드스피크 대표는 “커스 예술감독도 정부 지원금이 적어 힘들다고 하더라. 주로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농인 배우가 장애 극복의 아이콘에서 벗어나 예술적 가치로 평가받기까지 갈 길은 멀다. 우선 배우가 되고 싶은 농인들이 연기를 배울 곳부터 없다. “연기학원에 가보니 발성 연습부터 시키더라”는 게 핸드스피크의 한 농인 배우가 겪었던 실제 사례다.

그래도 조금씩 희망은 보인다. 2020년 정부의 광복절 경축식에서 송일국과 함께 사회를 맡아 주목받았던 농인 배우 이소별이 다음달 9일 첫 방송하는 노희경 작가의 새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에 캐스팅됐다. 극 중에서도 농인 배우 역을 맡는다. 이를 위해 제작진들도 간단한 수어 교육을 받았다. “트로이 코처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뭉클했다. 나도 큰 격려를 받았고 희망을 갖게 됐다”는 이소별은 29일 “앞으로 깊은 울림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도 이렇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