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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는 못 만들고 격차만 벌어져…비정규직법 폐지 고려해야"

중앙일보

입력

한국은 왜 악성 청년실업에 빠졌는가. 그래픽=최종윤

한국은 왜 악성 청년실업에 빠졌는가. 그래픽=최종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일자리는 늘리지 못하고 격차만 키웠다는 학계의 주장이 나왔다. 노동시장의 활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비정규직법(기간제법)의 폐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제안도 제기됐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한국노동경제학회, 한국노동법학회 등 3대 노동학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정책토론회에서다. 25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3대 노동 학회 공동 정책토론회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 교수는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실패로 진단했다. 권 교수는 "청와대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들면서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정책은 일자리 양을 개선하지 않고 (기존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데 초점을 뒀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하에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했다"고 지적한 뒤 "이는 자영업자의 저항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공정성 논란만 양산했다"고 말했다. 정책이 방향을 잃으면서 노동시장의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얘기다.

일자리 양을 개선했어야 하는데 질만 높이려다 청년 실업률 심각해져

일자리 양을 개선했어야 하는데 질만 높이려다 청년 실업률 심각해져

권 교수는 '비정규직 제로 선언'의 폐해로 "청년층은 대부분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취업함에도 불구하고 (정규직화 등 질 개선만 몰두하다) 격차만 악화했다"고 분석했다. 정규직 또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기득권 근로자와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하려 애쓰는 취업준비생을 비롯한 청년층 간에 임금 등 근로조건의 차이만 더 벌어졌다는 뜻이다.

권 교수는 "대부분의 신규 취업자가 비정규직 또는 중소기업 노동자인 상황에서 비정규직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법, 파견 근로자 보호법)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법이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낙인을 찍는 수단에 불과한 게 현실"이라며 "정규직 전환 제도로서의 구실을 못한다면 기간제법을 폐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대기업(원청)과 협력업체 종사자들 간의 격차 해소를 위해 "원청의 단체교섭이 협력업체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효력을 확장하고, 원·하청 간 공동노사협의회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심각해지는 고령화 현상을 한국 노동시장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침묵의 바이러스'로 규정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기조로 정책의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들었다. "해만 바뀌면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 나이들수록 성과와 상관없이 돈을 더 받는 연공급(호봉제)을 바꿔 직무, 역할, 자격 등으로 임금의 기준을 다변화해야 한다"며 "이를 전제로 고용연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그의 권고다.

정책을 믿지 못하는 게 가장 큰 경영애로 사항인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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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하는 정부 정책의 불안정성도 질타했다. 권 교수는 "한국은 정책 불안정성과 불신이 심각하다"며 "세계경제포럼은 우리나라에서 사업하기 가장 어려운 이유로 정책 불안정(policy instability)을 지목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권교체나 국회 의석 변화에 따라 노동정책이 단절적으로 변화한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는 툭하면 법원으로 달려가는, 사법적으로 해결하려 드는 기조가 만연했다. 심지어 노사 간 자율협약도 소송으로 따지려 들고, 법원도 덩달아 자율마저도 뒤집는 사례가 허다하다"고 한탄했다.

권 교수는 "노조와 노사관계의 역할이 노동시장에서 난제 해결을 위해선 가장 중요한데, 비관적"이라며 "대부분 노조가 경제적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만 몰입하고, 복수노조 하에서 노조끼리 조직화를 둘러싼 경쟁만 한다"고 꼬집었다. "그 결과 기득권 대기업 노조가 있는 곳의 근로조건은 세계 챔피언 수준이지만 협력업체는 고용불안마저 겪고 있다"고 말했다.

OECD 최하위권인 사회복지 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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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지분구조 변화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화도 경계했다. 권 교수는 "기업 소유권이 시장에서 분산되면서 외국인 주주의 지분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도모하기보다 단기 수익 극대화에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권 교수는 "대주주가 있을 경우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노동시장을 위협하는 행위를 자제하게 되는데, 외국인 주주 비율이 높으면 수익에 방점을 두고 최고경영자(CEO) 교체와 그에 따른 부수적 고용 관련 주문이 많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사회안전망과 관련 "고용보험과 실업부조제를 강화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근로장려세제(EITC) 제도의 구간별 소득 기준 조정을 통해 저소득 근로계층의 소득 안정화 방안 모색도 서둘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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