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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경제안보] 요소수ㆍ제재 헛발질...尹 '경제안보 집안정리' 나서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의 대러 제재에 동참을 머뭇거리던 지난달.
서방 국가의 한 외교관은 한 국내 인사를 만나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한국의 대러 교역 규모는 전체의 2%도 되지 않고, 북한 문제에서 러시아의 영향력도 제한적인데 한국은 왜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까. 대체 러시아를 왜 무서워하는 것입니까.

문제 제기는 맞는데, 질문이 틀렸다. 러시아가 무서워서라기보다는 경제안보적 사고 부족으로 ‘집안 정리’가 안 된 게 문제였다.

경제안보라는 축으로 이미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자원과 기술이 곧 정치적 무기로 탈바꿈하고 있지만, 이에 대처하는 한국 정부의 수준은 아직 아마추어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오히려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뻗어나가는 민간의 발목을 정부가 잡게 될 수도 있다.

7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 국가별 제재 현황판에 러시아에 대한 제재 내용이 표시돼 있는 모습. 연합뉴스.

7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 국가별 제재 현황판에 러시아에 대한 제재 내용이 표시돼 있는 모습. 연합뉴스.

FDPR 뒤늦은 적용...정부 내 조율 실패

최근 정부가 등 떠밀리듯 대러 제재에 뒤늦게 동참했다가 반도체 대러 수출과 관련해 미국의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적용 면제를 한때 받지 못했던 건 뼈아픈 대목이다. 제재 동참 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혀 진작에 면제국에 들어가야 했는데, 미국의 동맹ㆍ우방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열흘이 지나 이달 초 홀로 뒤늦게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정부 간 조율이 긴밀하지 않았음을 자인했다. 이는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정책실도 이런 조정기능에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대러 제재 동참이야말로 정부가 경제안보적 사고를 발휘했어야 하는 사안이다. 품목 관리 등 제재의 실제 이행과 파급 효과는 국내 산업의 영역이지만, 미 동맹과 직결되고 미국이 짜놓은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간 대결 구도에 발을 들이는 결정이라는 점에서는 고도의 외교적ㆍ정무적 판단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요소수 때도 '삐걱'...부처 기 싸움만

앞서 지난해 11월 중국발 요소 대란 사태 때도 정부 대처는 삐걱거렸다. 최전선에 있는 주중 대사관의 수장이 청와대 정책실장 출신의 장하성 대사인데도, 초기 위험 감지에 완전히 실패했다.

이미 대란이 현실화한 뒤에야 외교채널로 중국에 “기계약 물량이라도 빨리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땜질식 뒷수습이 이뤄졌다. 그 사이 중국 관영 매체 계열사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이 가진 중요한 지위를 분명히 인식하라”며 적반하장 식 태도를 보였다. 이때도 외교부와 산업부는 서로 상대방을 향해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며 답답해 했다.

요소수 품귀 현상이 벌어졌던 지난해 11월 경기도 고양시 한 주유소에 '요소수 재고 없음' 안내문이 붙은 모습. 연합뉴스.

요소수 품귀 현상이 벌어졌던 지난해 11월 경기도 고양시 한 주유소에 '요소수 재고 없음' 안내문이 붙은 모습. 연합뉴스.

인수위, 외교통상ㆍ산업통상 저울질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경제안보 정부 조직과 관련해 적극적으로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이 때문에 나온다.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 공약집을 통해 경제안보 강화 의지를 밝혔다. 총리실 산하에 ‘신흥안보위원회(ESC)’를 만들어 전통 안보를 제외한 경제ㆍ디지털ㆍ기후 등 신 안보 정책을 맡긴다는 구상인데, 이를 토대로 인수위에서 구체안이 만들어질 전망이다.

다만 물밑 논의의 폭은 더 넓다. 대표적인 게 현재 산업부에 있는 통상 기능을 외교부로 이관할지 여부 문제다. 인수위 사정에 밝은 복수의 관계자는 “‘외교통상’ 시나리오와 ‘산업통상’ 시나리오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며 “아직 어느 쪽에도 무게를 둔 상황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 프레스다방에서 취재진과 차담회하는 모습.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 프레스다방에서 취재진과 차담회하는 모습. 뉴스1.

외교부, '통상 되찾기' 드라이브

통상 기능은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교부에서 산업부로 이전됐다. 이 과정에서 부처의 명칭도 외교통상부→외교부, 지식경제부→산업통상자원부로 바뀌었다.

외교관에게 통상 교섭권을 다시 쥐여줘 경제안보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 자체에는 공감대가 존재한다. 현행 정부조직법을 보면 ‘경제외교’와 ‘국제경제협력외교’는 외교부의 사무로 규정하면서, ‘통상’과 ‘통상교섭 및 통상교섭에 관한 총괄ㆍ조정’은 산업부가 맡도록 벽을 세워놨다.

경제와 안보가 융합되는 시대에 이처럼 칸막이로 통상과 경제외교를 갈라놓는 것은 총력전에서 손 한쪽을 묶고 싸우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 17일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는 외교부 주최로 ‘경제안보 외교정책 포럼’이 열렸는데, 전ㆍ현직 외교관들이 나서 “통상은 외교부의 혼”이라고 강조했다. “외교부에 통상 관련 대표권이 없으면 엇박자가 난다” “통상ㆍ외교를 함께 다루는 게 국제 추세이며, 가장 특화된 곳에서 경제 안보를 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었다.

지난 17일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전 주미대사)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경제안보 외교전략 포럼에서 ‘경제안보 시대의 한국 외교 인프라 강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뉴스1.

지난 17일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전 주미대사)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경제안보 외교전략 포럼에서 ‘경제안보 시대의 한국 외교 인프라 강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뉴스1.

산업계와 '불통' 우려...외교부 "산업부 고유 업무는 이전서 제외"

하지만 이미 지난 10년간 통상 기능을 맡아온 산업부의 경험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지닌다. 경제와 안보가 통합된다고 해도 결국 국내 산업과 직결되는 공급망 관리나 품목 관리 분야는 산업부가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통상 기능을 전담할 경우 자칫 산업계와 유리된 통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산업계와의 원활한 소통은 산업부가 특화돼 있기 때문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2일 국제통상학회 등 주최 심포지엄에서 "통상정책을 두고 외교ㆍ안보의 수단적 측면만 강조하다 보면 '국부창출의 기반'이라는 통상 정책의 또 다른 산업적 측면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외교부 역시 통상과 관련한 모든 기능을 가져와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내부적으로 현 직제상으로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 산하 통상교섭실과 신통상질서전략실 등의 이전을 염두에 두고 있고, 대내적 공급망 운영 등 기존에 산업부 고유 업무였던 무역투자실 등은 산업부에 그대로 두는 것이 맞다는 입장이다.

통상 기능의 외교부 복원 필요성을 강조해온 송유철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산업부가 국내 산업계의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CPTPP(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한ㆍ중 FTA 등 굵직한 사안에서 실기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학계와 관가에서 나온다”며 “산업부는 국내 공급망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만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있다”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의 통상교섭본부 조직도. 차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 산하에 통상교섭실, 신통상질서전략실, 무역투자실이 있다. 외교부는 통상교섭실, 신통상질서전략실을 산업부에서 외교부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부 검토 중이다. 산업부 홈페이지 캡쳐.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의 통상교섭본부 조직도. 차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 산하에 통상교섭실, 신통상질서전략실, 무역투자실이 있다. 외교부는 통상교섭실, 신통상질서전략실을 산업부에서 외교부로 이전하는 방안을 내부 검토 중이다. 산업부 홈페이지 캡쳐.

외교 + 경제ㆍ통상 시너지가 핵심

부처 간 ‘밥그릇 싸움’처럼 비치지만, 사실 통상 이전 논의의 핵심은 ‘외교’와 ‘경제ㆍ통상’의 융합력을 발휘해보자는 데 있다. 최근 각국 경제ㆍ통상 전략의 흐름은 자국의 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최대한 낮추고, 거꾸로 외국의 자국에 대한 의존도는 심화하는 게 핵심이다.

관세 장벽을 앞다퉈 철폐하는 데에 골몰하던 자유무역의 시대가 가고, 경제 정책에 정치적 고려가 대놓고 개입하는 시대에 경제ㆍ통상과 외교가 따로 놀아서 되겠냐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은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공급망 문제를 직접 관할하는 것처럼 경제안보 컨트럴 타워를 두는 방안 ▲산업부의 통상 기능을 외교부로 이전해 경제외교와 통상을 함께 담당하는 장관을 두는 방안 ▲반대로 지금처럼 산업부에 통상 기능을 두고 경제외교와 관련한 실질적 권한도 주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경제안보 조직개편 시나리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경제안보 조직개편 시나리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컨트럴 타워를 두게 된다면 지금의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처럼 관련 부처 장관들을 불러 모으는 데 그치지 말고 훨씬 높은 수준의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게 전제다. 통상이나 경제외교 기능을 이전하는 경우 조직 개편의 진통은 있어도 기능 통합에 따라 단기간 내에 확실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손열 원장은 “현시대의 외교부 기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안보ㆍ경제ㆍ공공외교”라며 “경제외교가 외교부 기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통상교섭권을 갖지 못한다는 건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구조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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