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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교육·학습 기회 늘려 ‘재능 발현 스위치’ 켜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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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한민국 기술선진국의 비전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세르게이 브린 등등. 오늘날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면서 현대 문명의 법칙을 만들어가고 있는 혁신적 기업가들의 이름은 끝이 없다. 이런 혁신적인 기업가들은 태어날 때 도대체 어떤 재질을 타고 났기에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질문을 던지고,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한 것일까? 어린 시절부터 똑똑한 천재 혹은 괴짜로 불렸기에 모종의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분명한 듯한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들이 실리콘밸리에 몰려있다는 것도 특이하고 분명한 사실이다.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과학자나 혁신기업가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실리콘밸리에 태어나야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듯 보일 정도다. 그 이유가 뭘까?

본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 만큼 오래된 논쟁적 주제도 드물다. 찰스 다윈 이래 생물학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교육학자들이 본성론과 양육론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웠다. 80년대부터 꽃피기 시작한 진화발생생물학이라는 분야가 이 논쟁에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생물의 유전정보에 실려있는 것이 수많은 스위치들이라고 하면 정해진 조절프로그램에 따라 특정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면서 하나의 세포에 불과했던 수정체가 수 조개 세포를 가진 성체로 자라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외부환경이 이 조절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쳐 특정한 스위치가 켜져야 할 때 켜지지 않거나 꺼져야 할 때 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다르게 커갈 수 있다. 유전정보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겪게 되는 질병이 다르고, 다른 재능을 보이거나 다른 직업을 갖게 되는 것도 자라는 환경이 완전히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고나는 본성은 가능성으로 분명 존재하지만, 양육환경이 어떤가에 따라 그 타고난 가능성이 실현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성과 양육의 이분법이 아니라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rture)’이라는 제3의 시각이 제시된 것이다.

재능 타고났어도 발현할 기회·환경 못 만나면 재능 사장돼
혁신적 기업가·과학자가 기술선진국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
역량을 스케일업할 수 있는 지식·경험의 인프라 강하기 때문
야망 갖고 도전하고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는 나라 만들어야

빌 게이츠 MS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왼쪽부터)

빌 게이츠 MS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왼쪽부터)

이 이야기는 혁신적 과학자와 기업가들이 왜 기술선진국에서만 나오는지를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가령 과학적 호기심과 기업가적 도전의식이라는 스위치를 운 좋게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이 스위치를 켜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면 탁월한 과학자와 기업가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기술선진국에서는 각 사람에게 어떤 스위치가 있는지 여러모로 테스트해볼 수 있고, 그 가운데 탁월한 과학자와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스위치를 켜줄 수 있는 환경이 주변에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자기 계발에 열심인 많은 사람들을 채찍질하는 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 분야에서 명함을 내밀만한 전문가가 되려면 적어도 1만 시간을 혹독하게 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가령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4시간씩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9.6년 동안 쉬지 않고 해야 1만 시간을 채울 수 있다. 잘 엄두가 나지 않는 시간이라 며칠 만에 금방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법칙을 소개했던 말콤 글래드웰은 한 걸음 더 나간다. 1만 시간 노력해야 전문가가 되는 것은 맞는데, 문제는 어떤 사람은 1만 시간을 할 기회가 주어져 있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너 댓 살짜리 아기가 운 좋게도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바이올린이 돌아다니고, 클래식 음악이 일상적으로 들려오는 환경에 있다면, 타고난 음악가로서의 스위치가 켜지게 되고, 스스로 1만 시간을 하는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 아기가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바이올린을 전혀 접해보지 못했다면, 그 타고난 스위치는 켜지기를 기다린 채 평생 하루 벌이에 삶을 소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골프나 테니스·수영 등 상당한 사회적 인프라가 필요한 스포츠 분야에서 가난한 나라의 선수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스포츠를 접하고 재능을 발현시킬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성의 손이 있되 양육이라는 다른 손이 마주쳐주질 않으니 소리가 날 리가 없다. 탁월한 기업가도 그렇게 본성과 양육의 두 손바닥이 운 좋게 마주쳐 탄생한다.

빌 게이츠는 1955년에 태어났다. 1968년도에 부유한 부모의 도움으로 다니던 학교에서 GE사의 최첨단 컴퓨터를 사실상 무한히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13살이었다. 컴퓨터를 접한 바로 그 순간 빌 게이츠가 타고났던 프로그래머와 기업가로서의 스위치가 켜졌다. 컴퓨터가 너무 재미있었고, 밤낮없이 매달렸다. 20살도 되기 전에 이미 1만 시간은 거뜬히 채웠다.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재미있는 컴퓨터에 더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1975년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다. 스무 살 때였다.

1955년 당시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먹고 사는 것이 첫 번째 관심사였다. 그 해 한국에 90만8000명이 태어났다. 이들은 13살이 되었을 때 컴퓨터를 자유롭게 써보기는커녕 컴퓨터란 물건을 구경해볼 수도 없었다. 이 90만명 가운데도 분명 탁월한 프로그래머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스위치를 타고났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스위치를 켜줄 환경이 당시에는 없었다.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은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로서 빈곤과 불평등에 대한 통찰로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센의 핵심적인 주장은 인간이 더 많이 소비할 때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가난과 불평등·차별이 나쁜 이유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 자체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있는 역량의 스위치를 켜볼 기회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라의 금고에 아무리 많은 달러와 금을 쌓아놓아도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UN은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를 개발하고, 매해 각 국가별로 측정값을 발표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인간개발지수도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천연자원이 풍부하면 1인당 국민소득은 높을 수 있지만, 억압적 제도를 가지고 있거나, 불평등이 심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 스위치를 켜볼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국가의 경우 이 인간개발지수가 높을 수 없다. 아마르티야 센은 국민소득이 높은 국가가 아니라 인간개발지수가 높은 국가, 즉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발견하고,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국가가 진정한 선진국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대한민국도 이미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 모든 개발도상국들이 부러워하는 고소득 국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한국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비전이 단지 돈이 많은 고소득 국가일 수 없다. 각자가 자신만의 다양하고 고유한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스케일업하면서 성장해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탁월한 과학자도, 세상을 바꾸는 기업가도 탄생할 수 있다. 나아가 미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존경 받는 예술가도,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바꾸는데 기여하는 지도자도 나올 수 있다. 잘사는 나라를 넘어 행복한 나라가 되는 길이다.

탁월한 과학자나 혁신적 기업가가 기술선진국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는 이들이 태어날 곳을 고른 탓이 아니다. 누구나 과학자와 기업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스위치를 타고 나지만, 기술선진국이라는 환경이 그 스위치를 켜주고 1만 시간을 노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그래서 워런 버핏의 자기평가, 즉 자신이 얻은 부의 8할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덕분이라는 말은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각자의 고유한 재능이 무엇인지 평생동안 언제라도 테스트해볼 수 있는 교육과 학습의 기회가 풍부한 나라, 자신의 역량을 스케일업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공유하는 지식과 경험의 인프라가 든든한 나라, 과학자와 기업가로서 황당하게 보이는 비전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 실패했더라도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재도전의 기회가 있는 나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꿈과 야망을 가지고 테스트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충만한 나라가 기술선진국으로서 대한민국의 비전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