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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평화통일·정신개조·국난극복, 시대의 고민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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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윤석열 당선인은 어떤 취임사를 할까

역사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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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월 10일에 대한민국은 또 한 번 새로운 대통령을 맞는다.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9일 대선 이후 두 달 동안 인수위원회를 운영한다. 지난 선거 기간 동안 제시한 공약에 기반하여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취임사를 통해 그 핵심 내용을 발표한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사를 통해 어떤 그림을 발표했을까? (이하 대통령 호칭 생략)

공산주의자 장관 임명한 이승만

이승만은 세 번의 취임사를 했는데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평화통일을 제시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그리고 국민이 놀랄 만한 내각 인선을 할 것이라는 내용도 주목된다. 그 결과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 시 친분이 있었던 인사를 전혀 관련 없는 부처 장관에 임명했다. 두 장관은 1년도 안되어 물러났다. 결국 평화통일을 주장한 야당 지도자 조봉암은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정권마다 강조점 다르지만 모두 국민의 협조 부탁
박정희 5번 최다 기록 … 1972년 남북번영 첫 제시
‘국민의 정부’ 선언한 김영삼, 북핵 언급한 노무현
코로나19, 우크라전쟁 속 윤석열 정부의 지향점은?

1952년 두 번째 취임사에서 전시 인플레이션을 강조하여 이듬해 설날에 있을 통화개혁을 암시했던 이승만은 1956년 세 번째 취임사에서 처음으로 경제정책을 언급했다. 전쟁복구에서 경제부흥으로 가는 시점이었다.

부정부패의 요인이 됐던 귀속재산 불하, 금융정책을 언급하면서 경제부흥 5개년 계획을 언급했다. 당시 경제관료에 따르면 경제개발계획을 갖고 갔을 때 이승만은 자본주의에서 무슨 계획이냐고 하면서 결재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서야 겨우 발표된 산업개발 3개년 계획은 4·19 혁명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평화적 정권교체 잊은 박정희

취임사에서 이승만을 자유 진영의 두통거리라고 비판했던 윤보선은 군사정변이 일어나며 임기를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하야했다. 1963년 취임한 박정희는 가장 많은 다섯 번의 취임사를 했다. 5번의 취임사에서 박정희는 공통으로 정신개혁을 강조했다. 국민재건운동에서부터 새마을운동, 그리고 정신문화연구원 설립 등 박정희는 국민의 생각을 바꾸고 싶어했다. 마치 일제강점기 민족개조론이나 태평양 전쟁 당시 총동원 체제를 연상토록 한다.

물론 시기에 따라 강조하는 내용이 바뀌었다. 1963년과 1967년 취임사에서 내세웠던 평화적 정권교체는 3선 개헌 이후부터 사라졌다. 역대 대선 중 가장 근소한 10만표 차이로 승리했던 1963년에는 선거에 패배한 소수자의 의견을 중시하겠다 했다. 1971년 취임사는 박정희의 취임사 중 가장 짧은데, 1년 반 후 유신을 통한 또 한 번의 취임사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1972년 취임사는 유신선언문보다 훨씬 부드러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남북 간의 대결보다 서로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해 1973년의 6·23 선언을 예고했다. 6·23 선언에서 처음으로 남과 북이 각각 국제기구 가입을 제안했다. 국력에서 북한을 제압했음을 언급하면서 남북 간 대결을 강조했던 1978년 취임사와는 차이가 보인다.

민주·정의, 긍정적 단어 나열한 전두환

10·26 이후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최규하의 취임사를 염두에 둔 것인가? 1980년 전두환의 취임사는 최규하를 평화적 정권교체의 모범으로 치켜세우며, 가능한 한 모든 긍정적 용어를 나열했다. 민주, 복지, 정의, 대학의 자유보장. 그러나 지식인의 정치활동을 안보적 차원에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여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양산을 예고했다.

1년 후 또다시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전두환은 식민통치 36년 만에 광복, 광복 후 36년 만에 제5공화국을 강조하면서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고 했다. 취임 직후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과정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곡이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럼에도 취임사에서 제시한 평화적 정권교체 약속을 지켰다. 물론 자기 뜻보다는 6월 민주화항쟁의 결과였지만….

유신 이후 처음으로 부활한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는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과 신군부의 일원이었음을 의식했는지 과거를 묻지 말자 했고,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치적 단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곧 여소야대 정국에 휘말렸지만, 3당 합당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로써 진보·보수의 정치구도가 탄생했다.

한·미안보체제 언급한 김대중

30년 만에 직선제로 당선된 첫 민간인이었던 김영삼은 취임사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선언했다. 당시 유행어로 회자했던 한국병과 신경제를 취임사에서 제시했고,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1979년 야당 총재 시절의 소원을 다시 풀고자 했지만, 김일성의 죽음으로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노벨평화상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첫 평화적 정권교체로 취임한 김대중의 급선무는 금융위기 극복이었다. 작지만 강한 정부, 벤처기업 육성, 대기업 5대 개혁 등을 강조했다. 최규하 이후 처음으로 한미안보체제를 언급했고,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계승하면서 흡수통일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미 ‘햇볕정책’의 구상이 시작된 것이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에 열린 취임식에서 노무현은 북핵 문제를 가장 먼저 언급했다. 그는 처음으로 동북아 시대, 통일 이전에 평화의 제도적 장착, 그리고 대북정책의 투명성을 주장했다. 국민의 염려를 고려했기에 한미동맹 50주년, 야당과 대화협력, 그리고 균형발전을 주장했다. 이후 대북송금 특검, 한·미FTA, 야당과의 연정, 그리고 행정수도 이전 정책으로 이어졌다.

저출산·청년·소상공인·비정규직 대두

2008년 이후 보수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위기 이후 대두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가 취임사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대통령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저출산 고령화, 청년, 여성(이명박), 소상공인(박근혜), 공정경쟁을 통한 재벌개혁(박근혜·문재인), 비정규직(문재인) 등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10년 만에 보수정부로 회귀하면서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건국 60주년과 선진화의 원년을 선포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중에서 1948년을 건국으로 선택한 이명박 대통령은 역사 전쟁을 선포했다. 이념을 넘어 실용의 시대를 표명했지만, 이념전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계속됐다.

국정농단으로 전임 대통령이 탄핵당한 상황에서 문재인은 나라다운 나라를 전면에 내세웠다. 서로 다른 평가가 있었지만, 임기 말까지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명문,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가 취임사에서 탄생했다.

취임사 지키려 곤경에 빠지기도

역대 대통령 취임사를 보면 당시 시대 상황과 해당 정부의 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해준다. 따라서 모두 그 강조점이 달랐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었다. ‘국민의 지지’로 당선됐으며, ‘국민의 협조’를 구한 것이다. 국민을 섬기겠다는 대통령의 겸손함과 함께 경쟁자를 지지한 국민까지도 포용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취임사 내용이 대통령 자신을 곤경에 빠진 경우도 있다. 공약이 취임사로 이어지는 경우 이를 임기 내에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공약이 실제 상황에서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상황 변화에 따라 국민의 정서와 괴리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보수정부에서는 어떤 내용의 취임사를 내놓을까?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 경험이 일천하다는 지적이 대선 기간 내내 제기됐었지만, 인수위원회 없이 출발한 문재인 정부와는 달리 취임까지 두 달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의 위기 속에서 새 대통령의 취임사는 현실의 어떤 내용을 강조할지 자못 궁금하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