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홍성남 신부의 속풀이처방

누가 책임질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수녀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아동학대를 했다는 보도가 나간 후 수녀들에게 쏟아진 비난의 돌덩어리들. 수십 년간 아이들과 동고동락해온 수녀들이 어떻게 지낼까 궁금하여 방문하였다. 예상대로 심한 자책감에 빠져서 잠도 잘 못 자고 식사도 잘 못 하고 심지어 외출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집단우울증 조짐이 보여서 안타까웠다. 자신들이 아이들에게 더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수녀들을 보면서 과연 아동학대를 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수녀들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주고 싶다. 수녀들의 글을 읽고 정리한 내용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8년. 그 첫 출발은 6·25로 인하여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이곳에 생면부지인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부임해 오면서부터다. 그는 고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보육원을 도왔지만 아이들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엄마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여 부모 잃은 아이들의 허한 마음을 돌보아 줄 여성 봉사자들을 모집하였다. 이것이 수녀원의 시작이다.

아동학대 논란 속 수녀들
보육사업 중단될까 걱정
부모·사회·국가 책임 막중
우리가 비난할 자격 있나

1981년 5월 방한해 어린이들과 함께한 마더 테레사 수녀. [중앙포토]

1981년 5월 방한해 어린이들과 함께한 마더 테레사 수녀. [중앙포토]

거리로 몰려 떠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서 말과 행동이 거칠었고, 눈빛은 불안감에 차 있었고, 수녀들뿐만 아니라 서로도 믿지 못하였다. 젊은 수녀들은 아이들 이삼십 명이 생활하는 곳에 한 사람씩 들어가서 함께 살았다. 아이들은 수녀들의 돌봄을 받으면서 마음을 열어 갈 수 있었다.

한 아이가 제대로 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주뿐만 아니라 배려, 협력, 근면성, 정직함 등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체득되고 밥상머리에서 배워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매 순간 생존을 위해 버텨야 했던 아이들에게는 훔치는 것, 빼앗는 것, 속이는 것, 완력을 쓰는 것, 기회주의자로 사는 것이 더 쉬운 생존 방법이었다.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지만 수녀들이 아이들 곁에 함께 하면서 좋은 습관들이 조금씩 아주 서서히 아이들 안에 자리 잡아 갔다.

수녀들의 글을 보면서 과연 누가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들은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1차 아동학대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아이들을 버린 부모들이다. 심지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이들조차 있다 하니 사정이 어떠하건 간에 부모야말로 1차 아동학대자이다.

2차 아동학대자는 사회이다. 전에 보육원을 방문하여 아이들과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아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랑아 취급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었고, 취업도 결혼도 쉽지 않아서 사회적응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말했다. 수녀들을 비난하는 사람 중에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취직시켜주거나 자기 자녀와 혼인을 맺어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수녀들도 사회가 아이들에게 보인 차별로 마음의 아픔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을 위해 교육이 가장 필요하다 생각하여 학교를 보냈는데, 고아라는 이유로 시비와 싸움의 대상이 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보육원 아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보육원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심지어 집값 떨어진다고 안달을 하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세 번째 학대자는 정부이다. 근래에야 아이들을 돌본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이전에는 나이 어린아이들에게 돈 몇 푼 쥐여주는 것으로 할 일을 모두 끝낸 것이 정부이다. 아이들은 취업도 못 하고 지내다가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부모에게, 사회에게, 정부에게조차 버림받은 상처를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수녀들은 말한다. 누가 부모를 나무에, 자식을 가지에 비유하는 말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아이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아온 지 어언 60년이 되어간다고.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아도 꿋꿋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감사해 하고, 여느 부모들처럼 더 잘해주지 못함에 미안해하며 그들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이런 수녀들이 자책하면서 보육 사업에서 손을 떼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책임질 것인가? 수녀들을 비난한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책임 또한 져야 마땅하다.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