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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시험대에 오른 윤 당선인의 협치와 국익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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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윤석열 당선인이 뚝심 있게 광화문 집무실을 진행하는 것은 좋은 징조로 보인다. 가벼운 석양주(酒)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음주 정치’라 핏대를 세우지만 청와대 관저에서 ‘혼술’하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 “당선돼도 왕궁 같은 청와대에는 안 들어가겠다.” 윤 당선인은 대선 직전 존경하는 검찰 선배들 앞에서 다짐했다고 한다. 열린 정치는 그의 오래된 생각인 모양이다. 앞으로 더 중요한 협치와 일 잘하는 정부라는 약속도 어떻게 이뤄나갈지 지켜볼 일이다.

이번 대선은 특이했다. 기억에 남는 공약이라곤 여성가족부 폐지, 탈모 방지, 광주시의 복합쇼핑몰 유치 정도밖에 없다. 대선이 끝난 뒤의 풍경도 기이하다. 예전처럼 민주당 의원들이 광화문 광장이나 국회 계단에 단체로 무릎 꿇고 사죄의 큰절을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0.73% 대통령’이라고 연일 깎아내리고 있다. 586들은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을 덜 해서 실패했다”며 거꾸로 가고 있다. 운동권 특유의 관성이다. “우리가 172석이니 윤석열 뜻대로 안 될 것”이라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 을러대는 정청래 의원이 대표적이다.

김부겸 총리 연임되면 통합 변곡점
DJP 연합과 차원이 다른 연립정권
국익 감안하면 미·일 정상 통화 때
통화 스와프 복원부터 요청했어야

이렇게 겉으론 큰소리치지만 민주당 586들은 이번 대선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신앙이나 다름없었던 노동의 가치부터 송두리째 훼손됐다. 국민의힘은 부동산 실패를 집요하게 공격해 “땀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며 진보의 정치적 핵심 자산을 빼앗아 버렸다. 2030세대는 조국 사태로 “노오력(노력)까지 배신당하는 세상”이라며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민주화’ 포장 밑에 감춰졌던 운동권의 논리도 밑천이 드러났다. 진보진영은 줄곧 정부 주도의 수출형 경제성장을 ‘국가독점자본주의’라 공격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집권한 5년 동안 국가 주도의 관제 일자리만 양산했고, 부동산도 정부 주도로 세금 몽둥이만 휘두르다 망했다. 툭하면 재정만 퍼붓는 모순을 반복했다. 군사 정부와 싸우다 국가독점이라는 더 큰 괴물이 돼 버린 것이다. 이런 무능과 위선의 굴레는 벗어나기 힘들다.

윤 당선인은 대선 때 “양식 있는 민주당 분들과 협치를 하겠다”고 수차례 약속했다. 협치는 힘 있는 쪽이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고 양보해야 가능하다. 민주당이 어려운 지금이야말로 통합의 손을 내밀 기회다. 여권발 김부겸 총리 연임설(說)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희룡 인수위 기획위원장은 “개인적으로 가슴이 뛴다”며 “너무 좋은 방안”이라고 했다. 그는 20여년간 김 총리, 이광재 의원·남경필 전 경기지사 등과 매달 공부 모임을 통해 서로의 능력을 잘 아는 만큼 연임설을 더 반겼을 것이다. 민주당 채이배 비대위원도 “협치 측면에서 김 총리 유임이라면 긍정적”이라 했고, 이상민 의원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은 방안”이라 평가했다. 윤 당선인 측이 공식적으로 연임설을 부인했지만 아직 불씨는 살아있는 셈이다.

오히려 문제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김 총리가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지난 연말 그의 말이다. “대학 시절 데모 좀 했다고 이조판서(행자부 장관)에 영상(국무총리)까지 했으니 과분해도 너무 과분하다. 아내도 더 이상 선거는 안 도와주겠다고 딱 선을 긋더라. 요즘 양평에 퇴임 후 기거할 작은 집을 짓고 있다.” 그의 지인들도 자칫 야당 분열 수단으로 오인되기 쉽다며 경계했다. “여권이 공식 요청하고 민주당이 흔쾌히 ‘가서 협치를 도와줘라’고 당론을 모으기 전에는 김 총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라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 사회는 완전히 두쪽으로 쪼개졌다. 만약 김 총리 연임이 성사된다면 한국 정치가 통합이라는 새로운 변곡점을 지나게 된다. DJP 연합과는 차원이 다른 연립정권이 이뤄진다. 엄청난 지각 변동이 수반되는 만큼 여든 야든 신중하게 검토한 뒤 의견을 내야 할 사안이다. 이런 설익은 아이디어를 불쑥불쑥 흘리는 이른바 ‘윤핵관’들이 오히려 불안해 보인다. 너무 가볍다.

윤 당선인 주변도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느낌이다. 상징적인 장면이 미·일 정상과 전화 통화다. 당선인은 “오로지 국익과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했지만 첫 시험대인 해외 정상과의 통화는 허전한 뒷맛을 남겼다. 정작 최대 국익인 통화스와프 복원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7%대 인플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환율 안정은 눈앞의 현안이다. 문재인 정권은 한·중 통화스와프를 연장했고, 지난해엔 터키와 통화스와프를 맺었으나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1조원 가까운 손실을 보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미국·일본과의 통화스와프는 끊어진 상태다. 일본은 소녀상 마찰로 통화 스와프를 일방적으로 중단했으며, 미국도 지난 연말 슬그머니 한·미 통화스와프를 종료시켰다. 싸늘해진 한·미동맹의 현주소다. 윤 당선자는 이런 비정상부터 차분하게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통화스와프는 시장을 안심시킬 최후의 안전판이다. 최근 당국의 시장 개입에도 원·달러 환율은 무섭게 치솟고 있다. 어제는 마지노선인 달러당 1250원까지 위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