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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상욱의 미래를 묻다

차기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해결 첫 발 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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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원자력의 미래는?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코로나 팬데믹 기간, 국제 학회도 온라인이 기본이었다. 누군가 ‘비행기 타고 싶다’고 되뇌는 것을 들었다. 이제 곧 팬데믹이 끝나면 ‘보복 여행객’들로 공항이 미어터질 것이다. 현대의 항공 여행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매우 드물지만 항공 사고는 일어나고, 끔찍하다. 사람들은 어쩌다 비행의 위험을 감수하고 항공 여행을 일상적으로 즐기게 된 것일까?

여객기의 디자인을 보자. 제법 오래전 기종부터 최신형까지 여객기들은 대개 원통형 동체 아래에 주익이 있고 양 날개 아래 터보팬 엔진이 달린 디자인이다. 외형만으로 기종을 구별하기 쉽지 않다. 미국 더글러스사가 1935년 발표한 DC-3를 본격적인 여객기의 시초로 본다. 제트기로 좁히면 1958년 나란히 등장한 더글러스 DC-8과 보잉 707을 꼽는데 엔진이 바뀌었을 뿐 기본틀은 비슷하다. 20세기 초반 400대 넘는 DC-3가 항공 교통의 시대를 열었고 여객기의 지배적 디자인(dominant design)이 되었다.

‘발등의 불’ 탄소배출량 감축 과제
공론화에만 의존, 허송할 시간없어
유럽연합, 원전을 친환경투자 분류
검증된 가압경수로 사용이 바람직

신념 영역에 놓인 반원전

미래를 묻다

미래를 묻다

검증된 기술(proven technology)이라는 개념이 있다. 성능, 안정성, 경제성, 안전성과 수용성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기술적·사회적으로 검증된 무르익은 기술을 지칭한다. 수많은 사용례를 통해 경험치가 축적된다. 생산자와 서비스 공급자뿐 아니라 소비자와 규제 당국의 경험까지 포함된다. 항공 교통의 사회기술시스템은 100년 가까이 쓰이며 검증되었다. 크고 작은 고장과 사고들을 겪으면서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학습했다. 개선은 공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프로토콜과 루틴, 매뉴얼과 소통방법, 관리기법과 규제,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한 조사와 사후조치, 비행을 즐기는 탑승객 경험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함께 진화해 왔다.

충분히 검증된 기술은 위험(risk)을 관리해 안전을 향상할 수 있다. 위험에도 종류가 있는데, 가장 안 좋은 것이 알려지지 않은 위험이다. 공포 영화도 괴물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이 더 무섭다. 일단 드러나면 위험요소를 분석하고 대처방안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상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과공학(over-engineering)을 줄여 효율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놀랍도록 안전하고 쾌적하고 저렴한, 그리고 관리되는 위험이 사회적으로 수용된 항공 교통은 검증된 기술의 사례다. 지배적 디자인이 여러 세대를 관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명이 달린 기술은 새로운 시도보다는 검증된 디자인에 의존해 점진적 혁신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비행기 이야기를 한 것은, 비슷하게 ‘검증된 기술’이지만 전혀 다른 처지인 원자력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다. 원자력은 정치화되었다. 찬반 택일이 강요되고 선택은 진영을 가른다. 원자력계의 목소리에서 이해관계와 소망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고, 반원전은 신념의 영역에 있다. 현대의 원자력은 검증된 기술이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은 1951년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상업 발전은 영국에서 1956년, 미국에서 1957년에 개시되었다. 제트 여객기가 등장한 시기와 거의 같다. 이후 1960~70년대에 가압중수로(PHWR), 가압경수로(PWR) 등 2세대 노형이 상용화되면서 원전 황금기가 열렸다.

SMR, 방사능 유출 위험 적어

지난 2018년 3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바라카 지역에 건설 완료된 한국형 차세대 원전(4기 총발전용량 5060㎿) 바라카 1호기(오른쪽)와 2호기 모습. [연합뉴스]

지난 2018년 3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바라카 지역에 건설 완료된 한국형 차세대 원전(4기 총발전용량 5060㎿) 바라카 1호기(오른쪽)와 2호기 모습. [연합뉴스]

한국은 미국의 가압경수로를 모델로 1000㎿ 용량의 한국표준형원전을 개발하여 10기를 운영중이다. 한울3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한 것은 1998년 8월로 23년 전이다. 이후 1400㎿ 용량의 3세대 원전 APR1400을 개발해 4기를 건설중이고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한 4기 중 1호기가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원전은 기술의 역사가 80여년에 이르고 전성기인 1990년대 전 세계 전력의 약 17%를 생산했으며, 현재도 440여개가 가동되고 있다. 한국은 1978년 원자력발전을 시작했고, 30여년 전에 국산화에 성공했으며, 독자 기술을 갖고 있다. 요는 충분히 묵은 기술이며, 분명히 위험하지만, 위험의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원전 사고는 광범위한 지역의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미치는 확률적 위험이라 위험인식과 공포가 개인화된다는 점에서 항공 교통과는 다르다. 비행은 탑승 여부로 선택권이 개개인에 있고 먼 사고는 남의 일로 남는다. 장거리 비행은 시간 경쟁력에서 철도와 해상교통을 여전히 압도하지만 원전은 재생에너지의 도전이 매섭다. 재생에너지는 친환경성뿐 아니라 경제성도 갖춰 가고 있다. 경제성의 셈법이 복잡·다양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한국형 원전의 노형인 가압경수로는 원전의 지배적 디자인이다. 최악의 양대 사고가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은 흑연감속비등경수로(RBMK), 후쿠시마 원전은 비등경수로(BWR)다. 후쿠시마 원전 격납용기 폭발은 노형 불문하고 모든 원전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날려버렸다. 지배적 디자인의 지위가 위태로울 때 새로운 디자인들이 모색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원자력계가 내민 것이 소형모듈형원자로(SMR)다. 작고, 밀폐형으로 제작할 수 있어 방사능 유출 위험이 적고 내륙에 설치하기도 쉽다. 후쿠시마 같은 사고는 없을 거라는 어필이고, 연구개발만이라도 이어가 달라는 호소다. 정치권도 이에 적당히 호응하고 있다.

자유롭지 않은 사용후핵연료 문제

SMR이 또다른 지배적 디자인이 되어 원전에 등 돌린 사람들을 돌아앉히고 원자력을 구원할 것인가? 큰 원전은 싫지만 작으니 귀엽다 할 리 없다. SMR도 결국 기존 원전 부지 내에 설치해야 할 공산이 크다. 수요지 인근에 설치하는 분산형 전원은 희망일 뿐이다. 한국이 개발한 SMR개념의 SMART 원전의 출력은 100㎿e로, 한국표준형 원전 한 개를 대체하려면 산술적으로 열 개가 필요하다. 발전 원가는 기존 원전의 두 배가 넘는다. 기존 원전이 점보기라면 SMR은 소형 비즈니스제트기다. 역할이 같을 수 없다. 한국이 SMR을 성공적으로 상용화해도 짧게 잡아 10여년 뒤다. 당분간 탄소배출 저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SMR도 사용후핵연료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파이로프로세싱이라 불리는 사용후핵연료 건식 재처리기술과 소듐냉각고속증식로(SFR)는 국내 원자력계의 숙원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에서 플루토늄(Pu-239)과 남은 우라늄(U-235, U-238)을 전기분해로 추출한다. 이것을 SFR의 연료로 태우면 U-238이 Pu-239로 변환되며 플루토늄이 늘어나고, 이것이 핵분열에 가담해 에너지를 낸다. 핵연료 사용 효율이 증가하고 고준위폐기물을 줄이는 효과가 크다. 중성자 감속이 필요없어 냉각재로 액체 소듐(Na)을 사용한다. 최근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손잡고 소형 SFR 상용화에 나서 화제가 되었다. 다만 재처리기술과 증식로는 플루토늄 농축과 관련있어 예민한 문제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에서 파이로프로세싱 공동연구가 허용되었지만, 가질 수 없고 쓸 수 없는 기술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소듐 냉각재와 관련된 불안 요소는 사회적 수용성 확보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최근 2050 탄소중립 실현이 발등의 불로 떨어지고, 국제 실험로인 ITER의 완공이 다가오면서 선진 각국이 핵융합발전에 주목하고 있다. 마치 ITER 가동을 상용화 성공으로 여기는 듯한 들뜬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차 핵융합 발전을 2050년 이후로 전망하고 있다. 실험로를 통해 기술개발을 가속하고, 이어 실증로(DEMO)를 운전해 안전성과 경제성을 따져야 한다. 2050 탄소중립 이행에 동원할 수 없는 미래 기술이다. 실험용 삼중수소는 리튬에 중성자를 쬐어 인공적으로 만든다. 삼중수소는 방사성물질로, 제조시설을 품겠다는 지자체는 찾기 힘들 것이다. 핵융합은 사용후핵연료가 나오지 않아 청정하다는 이미지가 강점인데, 핵융합 반응에서 발생하는 중성자를 맞은 블랭킷과 구조체가 방사성물질로 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제원자력기구도 방사화 저감은 ‘중요한 도전’이라 밝히고 있다.

차세대 원전기술의 앞날, 안갯속

종합하면, SMR을 비롯한 차세대 원자력 기술들의 앞날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으며, 이들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역할이 제한적이라 탄소중립 이행의 즉시전력으로 보기 어렵다. 오는 5월 출범할 차기 정부는 본격적으로 탄소 배출량을 줄여나가야 한다. 정부수립 이래 접해 본 적 없는 난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기복적인 접근으로 허송할 시간은 전혀 없다. 유럽연합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원전 건설을 친환경 투자로 분류하기로 했다.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탄소 배출량 저감을 우선한 것으로 해석된다. 원자력 연구개발을 지속하되, 검증된 가압경수로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계속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용후핵연료는 원전 부지내 지상 임시저장시설에 쌓여가고 있다. 공론화는 필수지만 진전없는 도돌이표는 퇴보나 마찬가지다. 차기 정부는 사용후핵연료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첫발을 떼야 한다. 원자력을 보면 문제가 문제를 낳는다. 답을 내면 다음 답이 보일 것이다.

박상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