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금융 고립' 러시아…뱅크런에 루블화 폭락, 기준금리 20%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주말 동안 ATM기 앞에 사람들이 평소보다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문제는 루블화 가치가 본격적으로 떨어지는 이번 주부터일 것 같다.”

2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알파 은행 ATM기 앞에 사람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줄 서 있다. [AP=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알파 은행 ATM기 앞에 사람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줄 서 있다. [AP=연합뉴스]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오선근 재러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이 전해온 현지 상황이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배제라는 '금융 핵폭탄'을 맞은 러시아 금융시장이 혼돈의 월요일을 맞았다. '금융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루블화 가치는 30% 넘게 급락하고 이날 증시는 휴장했다. 루블화의 자유낙하와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러시아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0%로 전격 인상했다.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루블화 폭락에 기준금리 20%로 올려 

28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장중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119루블 선까지 떨어졌다(환율 상승). 전 거래일(지난 25일)보다 30% 가량 떨어지며 역대 최저수준까지 무너져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 달러당 75루블에 거래되던 루블화 가치는 2주 만에 40% 가까이 폭락했다.

루블화의 날개 없는 추락에 러시아 금융당국은 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이날 러시아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연 9.5%에서 20%로 10.5%포인트 인상했다. 루블화 폭락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러시아중앙은행은 또 외국인 투자자의 루블화 투매를 막기 위해 러시아 비거주자의 국채 매각도 일시적으로 금지했다.

다급한 러시아 당국은 증권시장 개장 시간을 늦췄다가 결국 휴장하기로 했다. 외환시장에 이어 증시까지 출렁일 수 있는 만큼 시간을 벌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RTS 지수는 지난 25일 936.94를 기록하며 이미 고점(1933.59) 대비 반 토막 난 상황이다.

해외 자금 조달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는 러시아 채권을 정크본드 수준으로 낮췄다. 무디스 역시 러시아 채권에 대한 신용 등급 재평가를 검토 중이다. 신용등급이 낮아지면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폭락하는 루블화 가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폭락하는 루블화 가치.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ATM 앞에 긴 줄, 뱅크런 조짐 

금융당국이 조급증을 보이는 건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의 조짐 때문이다. 외신들은 앞다퉈 달러 사재기에 나선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기자가 27일 오전 해외 은행 지점의 ATM기를 갔더니 미국 달러화가 바닥난 곳도 있었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지난 25일 러시아의 현금 인출 수요는 2020년 3월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모스크바 소재 쇼핑몰에 있는 현금인출기 앞에 서 있던 블라디미르(28)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한 시간째 줄을 서고 있다. 외화가 모든 곳에서 사라졌다”며 “이게 가능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늦게 왔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미국 등 서방의 경제 제재 대상에 러시아 시중은행도 포함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해외에서 운영되는 애플페이와 구글페이가 제재 대상 은행 계좌와 연결된 경우 먹통인 상황이라, 더더욱 지폐를 손에 쥐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8%대 인플레이션 더 심해지나 

금융 대란에 더해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죄어오는 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다. 루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수입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치솟게 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더 커질 수 있어서다. 지난달 러시아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8.73% 상승하며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 중앙은행의 고위 관료였던 세르게이 알레카셴코는 "루블화 가치가 30~40%가량 하락하면 물가상승률을 5%포인트 더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도 코로나19로 물가가 급등하며 일반 국민의 경제적 고통은 만만치 않았다. 오선근 사무국장은 "중앙은행이 발표하는 물가상승률이 8%라고 하지만 현지 언론에서는 실제로 물가가 13% 가까이 올랐다고 보도했다"며 "1000루블(한화 약 1만 4380원)로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진 느낌일 정도"라고 말했다.

공급망 위축에 따른 가격 인상도 현실화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러시아 최대 전자제품 유통업체인 DNS의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7일 각 체인점에서 물건 가격을 30% 인상했다고 밝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 시민은 "물가가 오르고 배송이 중단되면서 푸틴에게 대한 시민들의 환호도 사라졌다"고 전했다.

식료품 가격은 정부가 통제하는 만큼 사치재 위주로 가격이 급등하고, 사재기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오선근 국장은 ”과거 크림반도 사태 때도 가전제품 등이 오르기 전에 사야 한다는 사재기 움직임이 일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경제의 고립은 더 심화할 전망이다. SWIFT 배제 은행 목록과 일정 등이 결정되고, 각종 경제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금융 시장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산업계에서도 러시아 퇴출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FT에 따르면 영국 에너지업체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는 러시아 국영 석유업체인 로스네프트 지분을 전량 처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토마스 페핀스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가 (금융 혼란 속) 뱅크런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는 상황"이라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국제 우방은 러시아의 금융 붕괴를 어떻게 유리하게 활용할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