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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2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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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장원〉

다보탑을 줍다
강영석

하루의 무게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퍼즐 같은 보도블록 하나, 둘 더듬다가
가로등 기대고 있는 십 원을 주웠다

수많은 눈길 속엔 짐 같은 존재였는지
짓밟히고 채이다가 생채기만 남은 흔적
검붉은 이끼 사이로 팔각 난간 상처 깊다

시퍼렇게 날 선 바람 난도질하는 골목길에
몸 하나 담고 남을 몇 원 짜리 박스 포개
힘겹게 허기를 줍는 백발의 부르튼 손

먼 곳만 바라보며 걷던 발길 멈춰 섰다
발끝을 찌른다 딛고 섰던 바닥이
오늘 난, 국보 20호 단단함을 보았다

◆ 강영석

장원

장원

경기 여주 출생. 2018년 6월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현 D.CUBE 대표.

〈차상〉

어떤 도전
최은지

코로나에 휘둘리다 가다 말다 대학 4년
뉴스로 본 취준생 어느새 나도 뛴다
이력을 만드느라고 눈발 손발 붉었다

어쩌다 희망퇴직 공공 근로 하다 말다
낡은 양복 깃 세우고 딸딸 긁어 보낸 이력
폰 소리 귀가 닳도록 헛소리가 빙빙 돈다

깜도 안 된 시詩를 안고 어디든 두드린다
달빛 당겨 먹을 갈고 이생 전생 겨뤄 봐도
희망은, 기다릴 곳 있을 때 청매화가 피더라

〈차하〉

경칩
한영권

강물 몸 푸는 소리 홍매가 먼 귀로 듣고
화들짝 퉁방울눈 웅크린 뒷다리로
개구리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스프링

〈이달의 심사평〉 

2월 장원은 강영석의 ‘다보탑을 줍다’다. 10원짜리 동전을 통해 폐지 줍는 노인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그려냈다. 다보탑은 석가탑과 함께 과거와 현재 부처의 발현을 보여주는 상징성 짙은 탑. 10원짜리 동전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동전은 길에 떨어져 있어도 누가 줍지를 않는다. “짓밟히고 채”인다. “먼 곳만 바라보며” 큰 것만 기대하며 살기 때문이다. 화자는 “몇 원 짜리 박스”를 주우며 사는 노인이 “허기를 줍”듯 줍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다른 가치로도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국보 20호 단단함”이 함께 할 것이라면서.

차상은 최은지의 ‘어떤 도전’이다. 각 수 마다 다른 시적 화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첫 수는 코로나로 학교는 “가다 말다”했으나 “이력을 만드느라고 눈발 손발 붉”어져 어느새 취준생이 되어있는 대학생이, 둘째 수는 “공공 근로”를 “하다 말다”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다소 이른 퇴직자가 화자다. 셋째 수는 “달빛 당겨 먹을” 가는 시인 지망생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무엇에 도전하고 있다. 현실은 막막해도 “기다릴 곳 있을 때 청매화가 피더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건강하게 와 닿았다.

차하는 한영권의 ‘경칩’이다.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긴 하다. 그러나 그 소리를 “홍매가 먼 귀로 듣”는다거나 개구리가 튀어 오르는 장면을 “스프링”이라고 표현한 것은 상투성을 다 덮고도 남았다. 다의어로서의 spring을 적절하게 운용하여 봄이 확 “튀어 오”르는 입체적 이미지를 구사해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 강현덕(대표집필), 손영희 시조시인

〈초대시조〉

녹슨 문고리
김강호

어둠이 굴려내는 보름날의 굴렁쇠가
지상으로 굴러와 문에 턱, 박힐 때쯤
뎅그렁 종소리 내며 내간체로 울었다

원형의 기다림은 이미 붉게 녹슬었다
윤기 나던 고리 안에 갇혀 있던 소리들이
키 낮은 섬돌에 내려 별빛으로 피고 졌다

까마득한 날들이 줄지어 둥글어져
알 수 없는 형상으로 굳어 있는 커다란 굴레
어머니 거친 손길이 다시 오길 기다렸다

◆김강호

김강호

김강호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초생달’ 수록. 시조집 『군함도』외 4권. 가사시집 『무주구천동 33경』.

아무도 없는 집, 달빛만 가득한 고향집. 낡고 바랜 한지문은 달빛을 받아 오히려 희고 깨끗하다. 거기 매달린 문고리, 닳아서 윤이 나던 그 문고리는 녹이 슨 채 그저 고요할 뿐이다. 고단한 평생을 벗으시고 아버지 어머니도 멀리 가신지 오래. 그곳은 지난 세월 나와 형제자매가 태어나고 자란 하나의 세계였고 우주였다.

시인은 빈 고향집에 와서 그곳에서 탄생하고 피어났던, 이제는 사위고 떠나버린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고 있다. 이 시조에서 ‘녹슨 문고리’는 시 전체를 아우르는 커다란 상징이다. 문고리는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올 때 잡는 장치로서, 말하자면 이쪽과 저쪽의, 내부와 외부의 절대적이고도 외로운 경계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녹슨 문고리 이쪽이다. 녹슨 문고리 너머의 저쪽은 이미 지나버린 과거라는 시간과 공간이다. 시인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을 넘어, ‘굴렁쇠’ ‘종소리’ ‘원형의 기다림’ 등이 거느린 공통된 이미지를 차용하여 비어 있음에서 채움으로 가는 둥근 갈망을 은유하고 있다. 또한 시각, 청각, 근육감각 등의 공감각적인 장치들을 잘 배치하여 고요함과 차분함을 배경으로 한 돌올한 이미지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어둠이 굴려내는 보름날의 굴렁쇠가/지상으로 굴러와 문에 턱, 박’히듯, 우리의 존재는 아득한 영원성을 굴려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혼만이 회귀할 수 있는 원형적 상징으로 놓인 ‘녹슨 문고리’. 그 앞에서 시인은 가만히 뇐다. 어머니! 다시 오셔서 붉게 녹슨 이 기다림의 문고리를 잡아주시어요. 오래 갇혀있던 먼 저쪽의 소리들을 데리고 이른 봄빛 환한 이쪽으로 나비처럼 오시어요, 라고.

서숙희 시조시인

※1월 초대시조 오은주의 ‘큐브를 읽다’에서 첫째 수 종장 일부가 빠졌습니다. 오은주 시인과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뾰족한 고집의 주파수, 불협화음의 너와 나’로 정정합니다.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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