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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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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장원〉

햇볕 계단
-김보선

짧은 치마에 담긴 햇살 어디로 간 건지
수많은 신발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창문은 빛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무릎 걸친 바깥은 안쪽의 배후를 알까
숨어 있는 반 지하 붉은 눈을 밝혀도
당신 꿈 도착하기 전 골목이 고단하다

평생 오르고 싶은 마음 속 햇볕 계단
눅눅한 반점을 군데군데 남겨놓고
한 번도 환해본일 없이 눈빛만 번식한다

◆김보선

김보선

김보선

국립 한경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탈후반기 동인.

〈차상〉

풍선論
-이종현

태생은 말이야 얇게 저민 탄성彈性고무
입을 모아 날숨으로 한가득 넣는 거야
입구가 새지 않도록 묶는 것도 필수지
장소는 상관없이 혀의 경력이 필요해
팔방이 팽창해야 골목을 떠돌다가
부풀어 오른 소식에 귀가 달큼하거든
바람결 그러모아 은밀하게 덧칠할 때
귀를 닫고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야해
풍선을 부는 입버릇 생이 가벼울 뿐이야

〈차하〉

모으고, 불러들이고
-김영희

1
뾰족한 자석 끝은 쇳가루를 모으고
신선한 튀는 발상 뭇시선을 모으고
아슬한 피뢰침 끝은 하늘 불을 모으고

2
햇살은 가린 뒤태 그늘을 불러들이고
평화는 풀린 경계 방심을 불러들이고
먹이는 발 빠른 소문 경쟁을 불러들이고

〈이달의 심사평〉 

2022년 1월 첫 장원은 김보선의 ‘햇볕 계단’으로 올린다. 함께 보내온 세 편 모두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다. ‘햇볕 계단’은 반지하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빛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고” “눅눅한 반점을” “군데군데 남겨놓고” “눈빛만 번식한다”라는 시어들이 녹녹지 않은 반지하의 삶을 잘 그려낸다. 화자는 첫 수와 둘째 수의 하강 이미지와 셋째 수의 상승 이미지를 차용해 “무릎 걸친 바깥”과 “안쪽의 배후”를 대비시켜 화자가 “평생 오르고 싶은 햇볕 계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함으로 시적완성도를 높였다.

차상은 이종현의 ‘풍선論’이다. 입말의 묘미가 일품으로 조곤조곤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풀어내는 솜씨가 좋았다. 첫 수 “태생은 말이야 얇게 저민 탄성고무”에서부터 구체적인 시어를 사용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마지막 셋째 수 “풍선을 부는 입버릇” 과 “생이 가벼울 뿐이야”가 앞의 두 수를 받쳐줄 수 있는 의미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차하로는 김영희의 ‘모으고, 불러들이고’를 선했다. 이 작품은 우선 제목이 신선했다. 한 행 한 행 대구를 이루면서 각 장에 각운을 사용한 점과 활달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두 수가 어떤 연관성이 없이 나열로만 그친 점이 아쉬웠다. 그 외에도 황병숙의 ‘이등병의 소원’, 한승남의 ‘요정이 된 말뚝파스’, 박찬희의 ‘차를 마시다’ 최종천의 ‘약도’ 등도 오랫동안 들여다 본 작품들이다. 정진하시기를 당부드린다.

강현덕, 손영희(대표집필) 시조시인

〈초대시조〉

큐브를 읽다
-오은주

4×4 생각상자 이리저리 돌려본다
마음이 앞선 탓일까 삐걱대는 빨강 파랑
뾰족한 고집의 주파수, 불협화음의 너와 나

넌 왼쪽 난 오른쪽 커피를 젓던 시간
맞췄다 싶다가는 또다시 원점으로
모였다 또 흩어진 채 제자리만 맴돈다

눈과 입 버리고 나면 네 마음 내게 올까
화음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노래를 찾아
귀 열고 너를 향한다, 모서리가 말랑하다

◆오은주

오은주

오은주

2015년 국제신문, 경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20년 이호우·이영도 신인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조집 『달빛 길어 올리기』  『고요의 초상』

큐브, 아무리 돌려도 맞추지 못해서 결국은 포기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으리라. 영화 ‘행복을 찾아서’에서 큐브는 행복을 향한 눈물겨운 도전의 이미지다. 벼랑 끝에 선 한 가정의 가장인 주인공은 증권회사 간부와의 짧은 택시 동행에서 큐브를 맞추어야만 했다. 그 절박함 속에서 극적으로 큐브는 완성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큐브를 맞춘다는 것은 행복을 찾는 것으로 암시된다.

이 시조는 큐브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와 관계, 그것의 지향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 “불협화음의 너와 나”가 있다. “마음이 앞선 탓”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부터 색이 다른 “빨강”과 “파랑”이니 “삐걱”댈 수밖에 없는 것. “맞췄다 싶다가는 또다시 원점으로/모였다 또 흩어진 채 제자리만 맴돈” 너와 나이다. “화음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노래를 찾아” 시인은 “귀 열고 너를 향”하라고, 그러면 “모서리가 말랑”해진다고 강변한다. 이 따스하고도 순한 한 줄 시구는 마치 잠언처럼 서로에게 닫혀버린 마음의 문을 두드려 주면서, 귀 기울여 경청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청득심(耳聽得心)을 말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닐까.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모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사람은 모두 개별적 존재이다. 하여 너와 나의 관계에는 갈등이 숙명적으로 개입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보편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이리라.

새해다. 올해는 좀 더 여유롭고 조화로운, ‘화음의 세상’이면 좋겠다고 소망하면서 마지막 수의 종장을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그래, 눈과 입은 버리고 귀 열고 너를 향해보자. 그러면 세상의 모서리가 따스하게 말랑해지리라.

서숙희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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