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에디터 프리즘] 그래도 ‘착짱죽짱’은 안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77호 30면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김창우 사회·디지털 에디터

1869년 코만치의 족장 토사위가 “나 좋은 인디언”이라고 소개하자 미국의 필립 셰리던은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내가 알고 있던 좋은 인디언은 모두 죽었다(The only good Indians I ever saw were dead)”는 말이 와전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미주리 군대를 이끌면서 원주민의 의식주에 필수적인 들소 400만 마리를 몰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시행한 것을 보면 좋은 의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 제독이던 윌리엄 홀시는 “좋은 쪽발이는 6개월 전에 죽은 쪽발이뿐”이라고 말했다. 1945년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말 복서가 인간을 해친 것을 후회하자 돼지 스노볼이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뿐’이라고 위로한다. 1987년 영화 ‘풀 메탈 재킷’에는 헬리콥터 기관총 사수가 베트남 농민들에게 총알을 난사하며 “좋은 베트콩은 죽은 베트콩뿐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들어 좋은 사람이 언제나 먼저 죽는다고 한탄하는 의미로도 쓰인다는데, 미국 티파티 시위에서 “좋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뿐”이라고 부르짖는 것을 보면 여전히 혐오 발언(헤이트 스피치)에 가까운 것 같다.

반중 정서, 대선으로 혐오 발언 확산
남을 해코지하면 자신도 피해 볼 뿐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착짱죽짱(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사드 배치에 따른 제재 등의 영향으로 2016년쯤부터 우리나라에서 반중 정서가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개막식에 한복을 입은 조선족이 등장한 ‘문화공정’ 의혹, 난데없이 한국 선수들이 탈락한 편파판정 논란 등이 겹치며 폭발한 것이다. 중국으로 귀화한 평창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임효준(중국명 린샤오쥔), 러시아로 귀화한 뒤 중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로 나선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 등이 ‘을사오적에 맞먹는 매국노’라고 욕을 먹었다.

정치권에서도 혐오의 언어는 뿌리가 깊다. 여당 지지자들은 조국 전 장관 관련 비리를 보도한 언론은 토왜(토착왜구), 기소한 검찰은 권력의 주구라고 부르더니 부인 정경심씨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나오자 사법부까지 적폐라고 몰았다. 야당 지지자들은 여전히 지역 비하와 종북몰이에 거리낌이 없다. 일부에 국한된 얘기라지만 자정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혐오 발언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부인을 ‘직업여성’이라고 비하하더니 “살아 있는 소가죽을 벗기는 굿판에 직접 연루됐다”고 주장했다. 윤 후보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두고 “검사들이 룸살롱에 가서 술 먹고 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국민의힘 역시 ‘법카 초밥 10인분’, ‘쌍욕, 불륜 심판하자’ 등의 문구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부인을 겨냥하고 나섰다.

‘저주를 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남에게 해코지하면 자기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뜻이다.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 동료를 일부러 따돌리고 달렸다는 비판을 받은 김보름 선수는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빙판에 엎드려 사죄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의도적인 왕따 주행은 없었다”는 법원의 판결을 업고 세 번째 올림픽에 나섰다. 비록 5위로 마쳤지만 김보름 선수는 “응원을 받으며 달린 지금이 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썼다. 평창에서 스물다섯 살 여성에게 ‘노랑머리가 싸가지 없다’고 독설을 퍼부어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유대인의 수난사를 전시한 예루살렘의 역사박물관에는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는 말이 새겨져 있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는 동료들을 설득하는 데 이 말을 쓰기도 했다. 광기 어린 혐오의 말이 당장은 후련할지 몰라도 길게 보아 좋을 것이 없다. 한반도를 태평양 한가운데로 옮기기 전에는 중국·일본과 이웃해 살아야 하고, 선거가 끝나면 여야 지지자들은 다시 한 국민으로 어울려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