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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심사 통역사가 진술 왜곡, 신상 유출돼 현지 가족 체포되기도

중앙일보

입력

쿠르드계 독일 작가 히와K는 지난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위에서 본 장면'이라는 영상 작품을 걸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겨우 떠나 난민 입국 심사를 준비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서 왔는지 끊임없이 진술하지만, 심사에서 15년간 탈락한다. 결국 그는 살아보지도 않은 가상의 도시를 만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 지어 달달 외운다. 그러자 20분 만에 난민 심사를 통과한다. 난민 심사를 받는 이들은 끊임없이 '진짜 공포'를 진술하라고 요구받지만, 정작 관료주의적인 심사관들은 '위에서 본 듯' 정확한 장면이 아니라면 이들의 진술을 가짜로만 여기는 현실을 작가는 꼬집었다.

난민인권센터 사례 발표

2020년 11월 시리아 북서부 난민들의 임시 거처. AFP=연합뉴스

2020년 11월 시리아 북서부 난민들의 임시 거처. AFP=연합뉴스

한국에서도 난민 신청자의 진술을 통역사가 왜곡해 전달하거나, 지나치게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등의 문제가 제기돼 왔다. 난민인권센터는 다수 로펌과 협력해 법률 지원에 나선 사례를 모아 22일 발표했다.

"통역사가 진술 자르거나 왜곡"

A씨는 2012년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군에 맞서다 한국에 들어왔다. 난민 신청을 했지만, 이집트 아랍어에만 익숙한 통역사는 A씨의 진술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아 잠깐만, 잠깐만' 하며 말을 끊었다. '쉽고 짧게 얘기하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결국 A씨는 난민 심사에서 탈락했고, 법무부에 이의 신청해 2년 가까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난민 면접 조서가 대거 가짜로 기재돼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되는 일도 있었다. 2017년 중순부터 아랍어권 난민 신청자들의 면접 조서에 '돈을 벌기 위해 난민신청을 했다'고 적히는 등 신청자 진술이 왜곡된 사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법무부는 총 55건에 대해 결과를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비슷한 사례는 더 늘어났다. 재판부는 "업무 과다로 인한 누락이나 실수, 오역 정도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난민 면접 소요 시간이 20분 정도에 불과한 점, 문답을 신청자들에게 제대로 확인시키지 않은 점들도 고려했다.

2019년 난민인권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난민면접 조작사건 피해자 증언대회. 연합뉴스

2019년 난민인권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난민면접 조작사건 피해자 증언대회. 연합뉴스

법률지원단은 "통역인의 자질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하고, 같은 언어라도 국적이나 민족 등의 차이에 따라 어휘가 다를 수 있다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난민 면접을 녹화한 파일도 제공하지 않고, 열람만 허용하고 있는 점도 문제라고 봤다.

"법무부·법원이 지나치게 엄격한 증명 요구"

이집트 청년 B씨는 쿠데타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다 택시기사 사망사건의 용의자로 억울하게 몰려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2017년 한국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했지만 인정되지 않자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무부는 ①25년을 선고받은 판결문이 위조됐을 가능성 ②현지에서 중대범죄를 저지른 점 ③현지로 돌아가도 정부로부터 주목받지 않는 점 등을 주장했다. B씨와 법률지원단은 각종 증거로 법무부의 증거를 반박했고, 결국 2년의 재판 끝에 승소했다. B씨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법률지원단은 B씨처럼 충실하게 증거 자료를 내지 못하면 사실관계 증명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B씨를 대리한 김광훈 변호사(법무법인 동인)는 "난민 신청자가 현지에서 박해를 받을만한 공포가 '전체적인 진술의 신빙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는데도, 여전히 개별 법원은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짐바브웨에서 반정부시위를 한 C씨는 체포 영장이나 사형집행문 등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재판에서도 졌다. C씨를 대리한 송윤정 변호사(사단법인 정)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탈출하다시피 떠나온 이들이 증거를 꼼꼼하게 모아오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또 서류나 자료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가족이나 지인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극도의 두려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술의 일관성, 설득력, 현지의 환경 등을 비춰 합리적인 경우에는 법원이 증명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집트에서 온 D씨가 겨우 받아낸 난민인정증명서. 사진 사단법인 두루

이집트에서 온 D씨가 겨우 받아낸 난민인정증명서. 사진 사단법인 두루

이집트 청년 D씨의 경우 무리한 사실 조회 과정에서 현지에 있던 동생이 추가로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D씨가 증거로 낸 형사 판결문을 D씨의 동의 없이 이집트 대사관으로 보내 진위를 확인했고, 당시 수배 중이던 D씨의 동생은 체포돼 현재까지 수감 중이다. 법률지원단은 대사관의 사실 조회 과정에서 신원이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인 브로커에 속아도 외국인만 처벌"

난민 신청 결과를 기다리거나, 탈락한 상태에서 체류를 허가받은 '인도적 체류 허가자'에 대한 처우도 지적됐다.

예멘에서 온 인도적 체류 허가자 E씨는 체류 연장에 필요한 주거지 임대차계약서를 브로커에게 받았는데, 알고 보니 이 서류는 가짜였다. E씨는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해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수사기관에 검거된 브로커는 범칙금을 내고 기소되지 않았지만, 그렇지 못한 E씨는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E씨가 허위로 주거지를 기재할 이유가 없고, 가짜 계약서를 만드는 과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E씨를 대리한 홍석표 변호사(법무법인 광장)는 E씨와 같은 사례가 상당히 많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허위 문서를 작성한 한국인 브로커는 경제적 어려움 등을 주장해 범칙금을 감면받고 처벌도 면하는데, 외국인들은 적절히 변호인의 도움도 받지 못해 유죄 판결을 받고 출국명령을 당할 수도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행정 편의를 위해 주소지를 기재하게 하고 증빙서류를 요구하는데도, 관련 경고 문구도 없이 처벌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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