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알'서 자백 방송했는데…제주 변호사 살인사건 '무죄' 반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99년 제주에서 발생한 변호사 피살 사건에서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지난해 8월 21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법으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1999년 제주에서 발생한 변호사 피살 사건에서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김모씨가 지난해 8월 21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법으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의 장기미제사건인 ‘제주 변호사 살인사건’과 관련해 살인 범행을 공모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남성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법원 형사2부(부장 장찬수)는 17일 오후 살인, 협박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모(56)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본인의 자백 취지의 인터뷰를 방영한 한 방송사 PD를 협박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하고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이로써 이 사건의 피의자가 22년 만에 검거돼 구속까지 됐으나 직접 증거가 부족해 다시 미궁에 빠지게 됐다.

재판부는 “성명불상의 인물이 발각될 위험을 감수하고 피고인에게 살인을 지시했을지부터가 의문”이라며 “피의자 진술 외 별다른 추가 증거가 없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상당 부분은 단지 가능성과 추정만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부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을 향해 “법률적 판단이 무죄라는 것”이라며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제주지역 조직폭력배 ‘유탁파’의 전 행동대원인 김씨는 1999년 8∼9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어 이 변호사를 손 좀 봐줘야겠다. 절대 봐주면 안 된다”라는 누군가의 지시와 함께 현금 3000만원을 받았다.

범행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위임받은 김씨는 동갑내기 조직원 손모씨와 이 변호사를 미행하며 동선과 생활 패턴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가해 방법을 상의하는 등 범행을 공모했다.

이들은 검도유단자인 이 변호사를 제압하기 위한 범행도구를 결정했으며, 검사 출신인 이 변호사에게 단순 상해만 가했을 경우 사회적 파장이 일고 결국 덜미가 잡힐 것으로 보고 공모 단계에서 살해까지 염두에 뒀다.

손씨는 결국 같은 해 11월 5일 오전 3시 15분에서 6시 20분 사이 제주시 삼도2동 제주북초등학교 인근 노상에 있던 피해자를 발견하고 흉기로 피해자의 가슴과 복부를 3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 사건은 김씨가 지난 2020년 6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살인을 교사했다고 자백하는 취지의 주장을 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찰은 곧바로 재수사에 착수해 지난해 4월 김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고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캄보디아에 체류하던 김씨는 지난해 6월 불법체류 혐의로 현지에서 검거됐으며, 같은 해 9월 제주로 압송됐다.

경찰은 김씨에 대해 살인 교사 혐의를 적용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은 김씨의 역할과 재수사 단초가 됐던 김씨의 방송 인터뷰, 범행 현장과 흉기 모양에 대한 김씨의 구체적 진술 등에 비춰 살인죄 공모가 성립된다고 판단해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은 사건 당시 김씨가 구체적인 범행 지시를 내리는 등 범행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공모공동정범 법리를 적용했다.

공모공동정범이란 2명 이상이 범죄를 공모한 뒤 그 공모자 중 일부만 실행에 나아간 경우 실행을 담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공동으로 범죄 책임이 있다는 법리다.

그러나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이 사건 범행에 가담한 적이 없다”면서 “방송 인터뷰에서 자백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리플리증후군(허구를 믿고 거짓말을 하는 성격장애)에 의해 허황되게 진술한 것”이라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재판부는 심리 끝에 검찰의 공소사실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고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시한 증거는 상당 부분 가능성에 대한 추론에 의존한 것”이라며 “주범(손씨)의 범행 경위 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공소사실이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1심 선고 뒤 입장문을 통해 “피고인이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범행을 자백하는 임의성 있는 진술을 했고, 그 밖에 여러 관련자의 증언과 물증 등 제반 증거와 법리에 비춰 범죄사실이 충분히 입증되는 것으로 판단해 기소했다”며 “판결문 전문을 면밀히 검토한 후 항소심을 통해 범죄사실을 충분히 입증하겠다”고 밝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