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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미국은 왜 1968년 대북 보복 공격 막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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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전협정 69돌 … 남북관계의 어려움

역사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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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미국 특사 밴스의 방한

1970년대 말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사이러스 밴스는 1968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 존슨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다. 북한 무장게릴라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북한에 의한 미국의 정보함 프에불로호 나포 사건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와 논의할 목적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밴스 특사를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임무를 맡겼다. (국무부 비망록, 1968년 2월 9일자)

①1968년은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빠른 귀환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북한과의 공개회담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②푸에블로호 사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전달해야 한다. ③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부하들이 북한에 대해 무력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한·미 간의 동맹에 위험과 제약을 가져올 것이다. ④한국군을 베트남에서 철수시키겠다는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북한의 수많은 도발, 비정상적 국가라 외교로 풀기 어려워
한국의 대북 공격은 대부분 북한의 도발에 대한 ‘보복’ 성격
북한, 청와대 습격사건 때는 미국이 특사 보내 북 공격 막아
미국은 ‘제2의 한국전쟁’ 우려 … 한국 정부의 딜레마 깊어져

이 중에서 미국 정부가 특히 주목했던 부분은 ③항이었다. 한국 정부가 먼저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밴스 특사 사이의 협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남쪽이 먼저 공격을 했다고?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밴스는 대통령, 부통령, 국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장과 직접 회의를 했다. 그만큼 그의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맥나마라(전임 국방부장관)=남한군의 북으로의 습격은 어떻습니까?

▶밴스=한 달에 두 번꼴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존슨=우리는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습니까?

▶밴스=그들은 최근 한 달에 두 번 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북에 대응하는 반(反)침투 부대는 국방부장관이 통제합니다. 그들은 최근 공격에 사단 본부를 동원했습니다. 3월이 가기 전에 비무장지대를 넘는 공격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중략)

▶러스크(국무부장관)=만일 남한이 DMZ를 넘어서 북을 습격한 사건이 570건이라는 정보가 드러난다면 우리가 곤란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까?

▶맥나마라=우리는 이러한 습격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밴스=바로 여기 목록이 있습니다. 10월 26일과 12월 사이에 11번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험프리(부통령)=언제 시작되었습니까?

▶밴스=저는 모릅니다. 최소한 1년 동안 있어 왔다고는 생각하지만요. (중략)

▶존슨=이러한 습격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휠러(합동참모본부장)=보복적인 성격입니다. (중략)

▶러스크=우리는 20년 전에 이승만과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북한을 치려고 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양보해 주었습니까?

▶클라크 클리포드(신임 국방부장관)=저는 박 대통령의 불안정성이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그는 주요한 행동을 취할 권한을 그 자신이 가지고 있습니까?

▶밴스=장군들이 우리에게 알릴 것이고 지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라고 하면 그들은 가야 합니다. 한 장군은 본스틸 장군(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그가 일방적 행동의 가능성 때문에 매우 두렵지만 만일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은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왜 보복에도 반대했는가?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후 69년간 남북 간에 수많은 충돌이 있었다. 그 충돌 중 대부분은 북한의 도발 때문에 일어났다. 이 점은 남한의 신문뿐만 아니라 미국 측의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민주화 이전에는 그 책임이 반드시 북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위의 대화에서도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의 북한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북한의 도발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밴스가 방문하기 이전인 1966년과 1967년에도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에 대해 항의한 적이 있었다. 특히 1966년 10월 말의 사건은 미국 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필리핀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참전국 정상회담을 갖고 귀국하는 길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존슨 대통령이 서울에 있을 때 북한군의 도발이 있었고, 이로 인해 유엔군과 한국인 카투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후 주한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은 몇 주 전에 있었던 한국군의 북한군에 대한 공격에 대한 북한의 보복 조치였다. 주한미군사령관은 국방부장관에게 직접 항의했고, 이러한 사태의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한국 정부도 미국의 항의에 대해 할 말이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보복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군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이 공격을 받기만 하고 그에 대해 맞대응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군대인가? 분명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군의 보복 공격에 대해 왜 이렇게 예민하게 대응했을까?

우선 미국은 한국에서 또다시 한국전쟁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국력을 쏟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한다면,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힘을 쏟고 있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 시기에도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 이상 한반도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미국의 정책은 1953년 이후 현재까지 한국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보복 공격이 북한이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할 것으로 보았다. 박정희 정부의 북한에 대한 공격이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적인 보복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이를 예민하게 생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민주적 정부라면 국지전적인 보복공격을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렇지 않다.

DJ “전쟁 나면 40대 이상 내보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한 학술대회에서 했던 얘기가 있다. 전쟁이 발발하면 20대가 아니라 40대를 전쟁터에 보내자. 전쟁 결정은 40대 이상이 하고, 전쟁터에서는 20대가 희생된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들을 전선에 보내야 공정한 것 아닌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통일부도 필요 없다. 북한과의 관계도 다른 나라와의 외교와 마찬가지로 외교부에서 다루면 된다. 박정희 정부가 왜 통일원을 만들고 통일원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했는가? 북한 체제의 성격이 그렇듯이 남북 관계도 일반적인 외교관계와는 다른 특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는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