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시험의 시대 끝났다…맞춤교육으로 창의성·인성 키워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교육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이주호의 퍼스펙티브

교육의 지각 변동 시기에 한국 교육은 시대에 크게 뒤떨어지고 교육 선진국들에 급격히 뒤처지고 있다. 2010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칭찬했지만, 지금은 한국 교육을 부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해외 교육 전문가들은 왜 한국이 높은 기술력과 우수한 교사에도 불구하고 교육 변화가 느린지 의아해한다.

세계적으로 교육 지각 변동이 시작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그나마 팬데믹으로 온라인 학습이 불가피해지면서 뒤늦게야 변화가 시작됐다. 우리 교육의 현재 상황이 마치 세계 변화에 문을 걸어 잠그고 내부 싸움에만 몰두하던 구한 말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유일까.

한국은 학년 올라갈 때마다 학생 솎아내는 선별 중심 학습
선진국에선 암기·입시 위주의 공장형 교육 모델 이미 폐기
AI 같은 에듀테크 활용한 수준별 맞춤학습 기회 넓혀 가고
평생학습 보장하며 교육의 계층이동 사다리 역할 복원해야

지난 10년간 글로벌 교육에서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뉴욕타임스는 2012년을 ‘무크(MOOC)의 해’로 규정하면서, 미국 스탠퍼드대와 MIT의 명강의를 모두가 무료로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는 교육 혁신에 열광했다. 그 후 무크의 일방향 온라인 강의의 한계점이 드러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AI(인공지능) 튜터 등 에듀테크 투자 붐이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중국도 가세하면서 에듀테크는 차세대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교실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대학이 혁신생태계의 허브 역할

뇌과학과 인지과학 발달로 주입식 시험 중심 교육의 문제점이 과학적으로 밝혀지면서 프로젝트 학습이나 거꾸로 교실 등 새로운 교수·학습 방식도 빠르게 확산 중이다. 또 미국 대학 중에서 연구와 교육의 수월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더 많은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새로운 교육 모델을 성공적으로 도입하는 ‘제5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 동시에 대학의 신산업 혁신생태계의 허브 역할도 강화되고 있다.

이처럼 교육 지각 변동의 핵심은 100년도 더 된 낡은 교육 모델을 완전히 새로운 모델로 바꾸는 혁명적 변화이다. 낡은 교육 모델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잠재력과 수요를 무시하고 표준화된 획일적 수업에 치중하는 대량 생산의 공장형 방식이었으며 상위 교육기관으로 올라갈 때마다 아이들을 솎아내는 선별 중심의 교육이었다. 많은 학생을 실패하게 하였던 선별 중심의 공장형 교육 모델이 드디어 퇴장하고 모두에게 맞춤교육을 제공하여 모두를 성공시키는 새로운 교육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교육은 경제성장과 사회혁신 엔진

이제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광복 후 필요한 인력을 공급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엔진 역할을 했으며 모두에게 9년의 기초 교육을 받고 많은 이에게 질 높은 직업 교육과 대학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서 교육의 긍정적 역할이 크게 위축되면서, 교육의 힘을 의심하고 교육의 변화를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한국 교육이 낡아서 폐기되어야 할 모델을 교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교육 모델을 도입할 수 있다면 교육은 다시 경제 성장과 사회 혁신의 엔진이 될 수 있고 교육의 계층 이동 사다리도 복원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교육 지각 변동의 진원지가 되도록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 교육의 지각 변동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누가 무엇을 배울까 하는 것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1900년대에는 지식의 양이 2배가 되는 데 100년 걸렸으나 현재 사물인터넷(IOT)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는 12시간이면 2배가 된다. 따라서 지식을 암기할 것이 아니라 지식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암기보다 핵심 개념의 이해 중심으로 지식 기반을 튼튼히 하고, 그 토대 위에 데이터·공학·인문학 등을 포괄하는 고차원적 인지 역량을 키우고, 창의력·비판적 사고력·협력·소통 역량 등 창의·인성까지 길러야 한다.

모두에게 이러한 역량을 키워주기 위하여 교육은 영유아부터 평생 이뤄져야 한다. 지식이 급팽창하는 세상에서 12년 혹은 16년의 교육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며 영유아 시기부터 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사의 역할부터 달라져야

둘째,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하느냐에서도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AI 보조교사와 같은 첨단 에듀테크를 활용하여 모든 학생에게 맞춤학습 기회를 제공하면서 교사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교사는 인간적 연결을 강화하며 학생의 창의성과 인성을 키워주는 프로젝트 학습 등에 집중하여야 한다. 교사의 역할은 강의보다는 코칭·멘토링·학습 디자인 등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그동안 학생 평가가 학습과 분리돼서 입시 지옥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AI 기술은 데이터 기반으로 학생에게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하고 교사에게는 큰 부담 없이 개별 학생의 성취를 학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악하거나 빈번하게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학습과 평가의 통합으로 평가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수능과 같은 고부담 시험은 10년 이내에 사라질 것이다.

셋째, 대학이 평생학습과 혁신의 허브로 전환하는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전혀 다른 기능들을 융합하는 하이브리드 조직으로 발전할 것이다. 대학의 평생교육 기능이 크게 강화되면서 고등교육과 평생교육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또 대학의 연구·개발 기능과 혁신생태계의 허브 기능 간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예컨대 AI 연구의 리더인 캐나다 토론토대에서는 AI 연구에 필수적인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AI 기업 연구소들을 캠퍼스 안으로 유치하고 있다. 바이오나 에듀테크와 같은 신산업의 경우 캠퍼스 내에 혹은 주변에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팬데믹 이후 온라인 교육이 강화되면서 사이버 대학과 일반 대학의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

교육 혁신의 세 가지 길

만약 한국이 교육 지각 변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면 경제 성장과 사회 혁신의 엔진을 재점화하고 교육의 계층 이동 사다리도 복원할 수 있다. 다음 정부는 교육을 다시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새로운 교육의 힘으로 한국이 다시 도약하도록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무엇을 배울까 하는 것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려면 신설된 국가교육위원회에서 국가 교육과정을 과감하게 전면 개편해야 한다. 역대 정부마다 국가 교육과정을 개편했지만 소위 교과 이기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다음 정부는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와 리더가 참여하는 범국가 교육과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지각 변동 수준으로 과감하게 교육과정을 개편하자.

둘째,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하느냐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려면 정부는 에듀테크 산업의 발전과 교사의 역할 전환에 집중해야 한다. 에듀테크는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디지털 디바이스·콘텐트·플랫폼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스타트업 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에듀테크를 사교육으로 보고 거부하면서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부터 에듀테크 산업을 지원하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또 에듀테크 활용 역량뿐 아니라 코칭·멘토링·학습 디자인 등의 역량을 갖춘 교사를 길러내려면 법학전문대학처럼 교육전문대학 제도를 도입, 석사 과정에서 현장 실습과 전문 교육을 강화하여 교사를 키워야 한다. 그리고 다음 정부는 새로운 교육 모델의 혜택이 소외계층 학생들부터 돌아가게 하는 ‘AI 교육 사다리’ 프로젝트부터 시작하여 보자.

셋째, 대학이 학령인구 급감으로 정원을 못 채우는 위기는 대학 구성원이 변화를 수용하도록 하는 측면이 있어서 교육 지각 변동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을 산하 기관 취급하면서 좁은 부처 테두리에 가두려는 교육부의 규제와 통제를 과감히 들어낼 때야만 대학은 평생학습과 혁신의 허브 역할을 하는 하이브리드 기관으로 전환하는 자율적인 혁신을 할 수 있다. 대학을 교육부 산하에서 떼어내 총리실로 편재하는 정부 개혁부터 시작하자.

이주호 아시아교육협회 이사장·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