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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NZZ 읽으며 혁명 계획, 이 시대 나침반 매체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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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호 22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호이, 채메(Hoi, Zäme)!”는 스위스독일어로 “안녕, 여러분!”이라는 뜻이다. 인구의 4분의 1이 외국인인 다문화 국가, 공용어만 4개인 연방 국가, 유럽 한중간에 있으면서도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국가의 각종 이슈를 이방인의 일상과 엮어 소개한다.

취리히 시내 벨뷔 거리에 있는 오데온 카페. 1911년 처음 문을 연 이후 유명 인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역사적 장소이자 관광 명소다. [사진 김진경]

취리히 시내 벨뷔 거리에 있는 오데온 카페. 1911년 처음 문을 연 이후 유명 인사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역사적 장소이자 관광 명소다. [사진 김진경]

다음은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의 단편소설 ‘증인들’ 중 일부분이다. “우리의 다음 모임은 유서 깊은 오데온 카페에서 있었다. 레닌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로 가는 통행권을 보장할 때까지 이 카페에 앉아 ‘새로운 취리히 신문’ 같은 것들을 읽으며 은밀하게 혁명을 계획했다.”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무솔리니. [사진 위키피디아]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무솔리니. [사진 위키피디아]

여기 등장하는 오데온 카페는 스위스 취리히 시내 벨뷔 거리에 있다. 1911년 문을 연 뒤 한 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커다란 창, 샹들리에, 대리석 벽 등 변함없는 아르누보 스타일을 고수한다. 유럽이 두 차례 세계 전쟁과 이념 대립으로 신음하는 동안, 중립국 스위스의 최대 도시 한중간에 자리 잡은 이 카페에 수많은 정치인과 작가, 학자가 모여 생각을 나눴다. 이곳을 드나든 유명 인사는 러시아 혁명가 레닌만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열혈 아나키스트였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1915년 즈음 오데온에 종종 나타났다. 오데온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스위스 연방 공대(ETH)에서 공부했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전기 작가로 잘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취리히에서 생을 마감한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도 초기 오데온의 단골 고객이었다.

코로나 관련 가짜뉴스 넘쳐나 ‘인포데믹’

오데온 카페 내부. 한 세기 전 레닌이 NZZ(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을 읽던 곳이지만, 지금은 바에 앉은 남자 앞에 타블로이드 일간지인 블릭(Blick)이 놓여 있다. [사진 김진경]

오데온 카페 내부. 한 세기 전 레닌이 NZZ(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을 읽던 곳이지만, 지금은 바에 앉은 남자 앞에 타블로이드 일간지인 블릭(Blick)이 놓여 있다. [사진 김진경]

소설 ‘증인들’로 돌아가 보자. 오데온에서 레닌이 혁명을 계획하며 읽었다는 ‘새로운 취리히 신문’은 대체 뭘까. 한국어 번역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 신문의 독일어명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 즉 NZZ이다. 1780년 창간된 NZZ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 전체에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AZ)과 더불어 가장 수준 높은 일간지로 꼽힌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 중도 보수를 지향한다. 취리히 지역 신문이면서도 국제 뉴스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게 강점이다. 내용은 훌륭하나 읽기 쉬운 신문은 아니다. 쓰이는 어휘나 문장 구조가 까다로운 편이다.

내가 4년 전쯤 NZZ 구독을 시작했을 때, 기사 수준보다 더 놀랐던 것이 있다. 구독료다. 종이 신문을 받아보며 온라인 기사도 읽을 수 있는 온·오프라인 동시 구독료는 월 77스위스프랑(약 10만원), 1년 구독료는 847스위스프랑(약 110만원)이다. 온라인 구독만 하면 구독료가 그나마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취리히가 전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높은 도시 중 하나임을 감안하더라도 만만찮은 금액이다. 구독료를 많이 받는다고 NZZ가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구독자가 꾸준히 줄어서 현재 10만이 채 안 된다. 얼마 안 되는 독자들이 이 어렵고 비싼 신문을 읽는 이유는 뭘까. 전직 변호사인 나의 독일어 선생님(스위스인)은 그 이유를 “듣기 편한 뻔한 말만 들려주는 신문이 아니라서”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하향 추세라면 소신을 계속 지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레닌. [사진 위키피디아]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레닌. [사진 위키피디아]

인쇄 매체가 처한 위기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비슷하다. 스마트폰만 봐도 온갖 공짜 뉴스가 쏟아지니 굳이 구독료 내 가며 특정 신문을 구독할 필요가 없다. 소셜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도 버겁다. 오락거리가 늘어나 뉴스 소비 시간도 전보다 줄었다. 넷플릭스에 날마다 올라오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신문 기사를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이대로 레거시 미디어가 사라지는 걸 내버려 둬야 하나. 미디어에도 적자생존의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가. 민주 사회의 시민이 소셜 미디어에 의존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레닌은 NZZ을 읽으며 혁명을 계획했다는데, 이 시대 혁명가에게 나침반이 되는 매체는 무엇인가.

미디어지원법 국민투표를 앞두고 취리히 시내 기차역에 걸린 홍보물. 스위스 전설 속 인물 빌헬름 텔이 양쪽 귀에 신문을 대고 있고, 그 아래에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은 사람은 미디어지원법에 찬성을!’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김진경]

미디어지원법 국민투표를 앞두고 취리히 시내 기차역에 걸린 홍보물. 스위스 전설 속 인물 빌헬름 텔이 양쪽 귀에 신문을 대고 있고, 그 아래에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은 사람은 미디어지원법에 찬성을!’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 김진경]

현재 스위스에서는 이 같은 질문들과 관련된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다. 오는 13일 실시되는 국민투표 안건 중 하나가 미디어지원법(Medienpaket)이다. 이 패키지 법안은 사실 지난해 6월 의회에서 통과된 것인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됐다. 스위스에서는 의회에서 통과된 법이라도 반대자들이 서명을 일정량 모아 제출하면 해당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존속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이 법안은 정부가 언론사 지원금을 지금보다 연간 1억5000만스위스프랑(약 1950억원) 더 늘린다는 내용이다. 신문 우편 배송료 지원을 확대하고, 지역 라디오·TV 방송에 지원금을 늘리며, 지원 대상이 아니었던 온라인 언론 매체에도 보조금을 준다.

지지자들의 주장을 보자. 죽어 가는 언론을 살리려면 지원이 필수다. 다문화 연방국가인 스위스의 독특한 지형에서는 언론의 다양성이 특히 중요하다. 공용어만 네 가지에 칸톤(주·州)별로 법이 제각각이다 보니 사는 곳에 따라 필요한 정보가 다르다. 중소 지역 언론사가 사라지면 그 지역 주민들이 질 좋은 정보를 접할 기회가 줄어든다. 보조금이라는 산소 호흡기를 기존 언론에 씌우는 것만이 그 사태를 막을 길이다. 돈이 없는 언론사는 광고주 눈치를 보느라 독립적 보도를 하기도 어렵다.

반대 측은 정부의 금전적 지원은 위기 타개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 언론 독립을 지킬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신문, TV, 온라인 등 채널의 경계가 무너지고 대부분의 뉴스가 스마트폰으로 소비되는 마당에 신문 배송료 지원처럼 특정 형태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다. 흥미로운 건 법안의 수혜자로 예상되는 언론사 중에도 반대자가 있다는 점이다. NZZ는 사설에서 “공공의 지갑에 기대면서 언론의 독립성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페북 등 소셜미디어, 키워드 필터링 한계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아인슈타인. [사진 위키피디아]

오데온 카페를 드나들었던 아인슈타인. [사진 위키피디아]

양쪽 주장이 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쩐지 양측 모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외면하고 철 지난 얘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지난 2년여를 돌아보자. 코로나19 팬데믹은 ‘인포데믹(infodemic)’이라고 불릴 만큼 바이러스, 백신과 관련한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 넘쳐났다. 이들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졌다. 기성 언론은 이미 퍼진 거짓 정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물론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도 콘텐트 모더레이션(content moderation)을 통해 거짓 정보를 걸러낸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에 해당하는 것으로, 키워드 필터링이나 이용자 신고,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등의 방식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선별 필터 자체가 미국 그리고 영어를 비롯한 주요 언어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대부분이 미국 기업들이라서다. 그들의 콘텐트 관련 기술과 정책이 미국 밖의 언어, 법규, 문화를 모두 반영하기란 쉽지 않다. 페이스북으로서는 영어 가짜뉴스보다 한국어 가짜뉴스를 포착하기가 훨씬 어렵다. 더욱이 사투리나 속어, 유행어 등으로 된 유해 콘텐트를 통제하는 건 지금도 불가능에 가깝다. 스위스독일어가 좋은 사례다. 스위스에서 쓰는 독일어는 표준 독일어의 심한 사투리 버전이고 표기 방식도 다르다. 스위스의 소셜미디어 콘텐트 대부분은 표준 독일어로 되어 있지만, 네오나치 등의 혐오 발언은 스위스독일어로 된 것이 많다. 혐오 발언 탐지 프로그램이 이것을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나 혐오 발언을 퍼뜨리는 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이용한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사투리나 속어도 문제없이 인식하는 스위스 지역 신문 편집자가 페이스북 인공지능 프로그램보다 낫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기성 매체가 정부의 지원금을 요구할 최대 명분 중 하나다.

최근 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Tages Anzeiger)와 인터뷰한 페이스북 내부고발자 프랜시스 호건도 인간과 알고리즘의 차이를 지적하며 “페이스북의 재앙적 영향 앞에서 레거시 미디어가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레거시 미디어가 최후의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만 한다면야 높은 구독료도, 정부 보조금도 아깝지 않겠다. 오데온 카페에서 신문을 탐독하던 레닌이 살아온다면 다가오는 국민투표에서 어디에 표를 던질까.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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