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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무역 허브 스위스, 러 제재 동참…신냉전? 뉴노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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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호 13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집회가 지난 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이 ‘푸틴을 막아라’ ‘평화를 위해 (러시아인 자산을) 동결하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김진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집회가 지난 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이 ‘푸틴을 막아라’ ‘평화를 위해 (러시아인 자산을) 동결하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김진경]

지난 5일 토요일 낮 12시, 스위스 취리히 젝세로이텐(Sechseläuten) 광장에 시민 4만여 명이 모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집회였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직접 그린 비둘기 그림을 손에 들었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두른 사람들도 있었다.

집회 현장에서 두 우크라이나인 야나와 빅토리아를 만났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스위스에서 살며 일하고 있지만 가족은 모두 우크라이나 수미(Sumy)에 있다고 했다. 수미는 우크라이나 북동쪽 도시로 현재 러시아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곳 중 하나다. 야나는 “가족들과 아직 연락이 되긴 하지만 너무나 불안하다. 살고 있는 건물이 폭격을 받아 지금 모두 지하 창고에 숨어 있다고 한다”고 했다. 빅토리아는 “제발 우리 얘기를 널리 전해 달라. 러시아를 막으려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야나가 말했다. “유럽 각국에서 구호물자를 보내 주는 것도 고맙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속하기만 했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아닐 겁니다.”

단상에서 정치인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스위스 녹색당 발타자르 글래틀리 대표가 말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에 의존하는 걸 줄여야 합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원자재를 계속 들여 오는 한, 이 전쟁을 멈추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파이프라인 카펜(Pipeline Kappen·파이프라인을 중단하라)’ 등 에너지와 관련된 구호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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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파라데플라츠에는 스위스의 양대 은행인 UBS(왼쪽)와 크레디스위스(오른쪽)가 있다. 특히 크레디 스위스는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 여전히 고객 정보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김진경]

취리히 파라데플라츠에는 스위스의 양대 은행인 UBS(왼쪽)와 크레디스위스(오른쪽)가 있다. 특히 크레디 스위스는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 여전히 고객 정보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김진경]

여기서 파이프라인이란 노르트스트림2를 말한다.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가 독일로 직접 천연가스를 보내기 위해 발트해 아래에 건설한 길이 1200km의 해저 가스관이다. 이를 이용해 러시아에서 보내는 가스의 양이 두 배로 늘어나 서유럽 에너지 시장의 판도가 바뀔 전망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완공된 후 운영 승인을 기다리고 있던 이 가스관의 운명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불투명한 상황에 놓였다.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2월 말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이 가스관 운영이 계속 보류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노르트스트림2는 건설 초기부터 말이 많았다. 그전까지는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유럽으로 운송될 때 우크라이나를 거쳐야 했고, 러시아가 지불하는 통과료가 우크라이나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두 나라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우크라이나가 가스관 통제라는 카드를 쓸 수 있었으므로 정치적 무기 역할도 했다. 그런데 노르트스트림2 건설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고 가스 수출을 하게 됐으니 러시아에 힘을 실어 준다는 비판이 많았다. 미국이 가스관 건설 막바지까지 반대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와 독일을 연결하는 가스관을 놓고 스위스의 집회 참가자가 중단을 외친 이유는 뭘까. 노르트스트림2 본사가 스위스에 있어서다. 정확히는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떨어진 작은 도시 추크(Zug)에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해 관광지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크는 다른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이 도시는 192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유럽 최저 법인세, 소득세를 내세워 부자들을 끌어모았다. 스위스에서 원자재 거래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약 1만 명인데, 그중 3분의 2가 제네바와 추크에 몰려 있다(스위스 연방통계청).

스위스에 대해 얼른 떠오르는 것들은 대개 평화로운 중립국, 알프스, 치즈, 정밀 시계 산업 등일 것이다. 그러니 스위스 기업 순위를 보면 좀 뜻밖일지도 모르겠다.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시계나 낙농업이 아니다. 매출액 기준으로 1위부터 5위까지는 비톨, 글렌코어, 트라피구라, 머큐리아 에너지, 카길 등 모두 에너지·원자재 기업이다(컨설팅 업체 비스노드, 2020년). 스위스무역운송협회(STSA)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면화의 65%, 곡물의 60%, 커피의 55%, 오일의 40%가 스위스에 기반을 둔 원자재 기업에 의해 거래되고 있다. 전 세계 원자재 거래 기업 중 약 900곳의 본사가 스위스에 있다. 원자재 강국인 러시아의 경우 원자재 거래의 80% 정도가 스위스를 거쳐 이뤄진다.

전쟁반대 집회에 참가한 스위스인 사라(왼쪽)와 노네타(오른쪽). 사라는 제재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스위스가 유럽연합(EU)의 제재안에 동참해 다행이라고 했다. [사진 김진경]

전쟁반대 집회에 참가한 스위스인 사라(왼쪽)와 노네타(오른쪽). 사라는 제재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스위스가 유럽연합(EU)의 제재안에 동참해 다행이라고 했다. [사진 김진경]

작은 내륙 국가, 그마저도 산악 지형으로 운송에 약점이 많은 스위스가 어쩌다 전 세계 무역의 허브가 됐을까. 바로 그 약점,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바다가 없으니 산을 뚫어 기찻길을 내고, 변변한 자원이 없다 보니 남의 자원을 가져다 가공해 되팔고, 낮은 세금으로 손님을 유인하면서 세계적인 장사꾼이 된 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후 법의 공백기에 자국 원자재를 국제적으로 거래하기 시작한 러시아인들은 이런 스위스에 주목했다. 영국 아스톤대학 교수인 사회학자 엘리자베스 쉼프푀슬은 러시아의 최고 부자 80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부유한 러시안들(Rich Russians)』(2018)을 펴냈다. 쉼프푀슬은 러시아 국영 기업의 잔해 위에서 원자재를 거래하는 새 사업을 벌임으로써 역사상 그 어떤 부자들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은 돈을 번 러시아의 이 새로운 부자들이 올리가르히라고 쓰고 있다. 올리가르히들이 스위스에서 탄생했다고 할 순 없지만, 스위스가 올리가르히의 성장에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우크라인 “나토 가입하는 게 가장 중요”

반전집회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 야나(오른쪽)와 빅토리아. 이들은 가족이 모두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수미에 있다고 했다. [사진 김진경]

반전집회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여성 야나(오른쪽)와 빅토리아. 이들은 가족이 모두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수미에 있다고 했다. [사진 김진경]

원자재 거래업과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은행업이다. 은행은 원자재 거래에 자본을 대고, 원자재 거래로 벌어들인 돈은 다시 스위스 은행으로 들어간다. 스위스 은행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자자하다. 부자들이 스위스 은행에 돈을 넣어 두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밀 보장이다. 스위스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저서 『왜 검은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1990)에서 “은행의 비밀 보장은 스위스라는 나라의 최고법”이라고 쓰고 있다. 정부 밑에 은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정부까지 좌지우지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면 스위스 은행이 보유한 러시아인의 자산은 얼마나 될까.

스위스 국립은행(SNB)에 따르면 약 100억 스위스프랑(약 13조원)이지만, 이는 매우 보수적인 추정치다. 스위스 일간 노이에취르허차이퉁(NZZ)은 현재 금융 제재 대상인 5명의 올리가르히들의 자산을 포함할 경우 이것의 15배인 1500억 스위스프랑(약 199조원)이 스위스 은행에 보관돼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EU)이 러시아에 대한 금융 제재를 취하면서 EU 회원국이 아닌 스위스의 동참을 촉구한 것은 그 때문이다. 스위스는 며칠간 미적대다 지난 2월 28일에야 ‘예외적 상황’이라며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집회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만난 또 다른 참가자 사라와 노네타는 스위스인들이다. 우크라이나와 아무 인연이 없는데도 집회에 나온 건 “스위스나 우크라이나나 다 같은 유럽”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스위스 정부가 뒤늦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라는 “국가 대상의 제재는 신중히 해야 한다. 그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모두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러시아 제재는 필요하다고 본다. 스위스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은 길을 택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지난 며칠간 나는 여러 채팅방에서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받았다. 러시아에 항의하는 뜻으로 저녁 8시에 집 안의 불을 다 끄자는 내용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유럽이 러시아의 가스나 오일 없이도 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것이다. 의도는 좋으나 그 각오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최근 추크에 있는 노르트스트림2 본사는 전체 직원 140명 이상을 해고했다. 러시아 가스관 회사지만 직원 상당수는 스위스인이었다. 러시아로부터의 돈줄이 막힌 스위스 은행과 스위스 원자재 시장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이것은 ‘신냉전’일까, 아니면 ‘뉴노멀’일까.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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