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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뽀' 없다, 믹스커피·컵라면이 복지…디테일에 '웃픈' 드라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며느라기2...ing’의 한 장면. 수시로 졸음이 오는 초기 임산부 사린(박하선)의 모습이 리얼하다. [사진 카카오TV]

‘며느라기2...ing’의 한 장면. 수시로 졸음이 오는 초기 임산부 사린(박하선)의 모습이 리얼하다. [사진 카카오TV]

퇴근 후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 잔 어떻냐는 후배의 제안에 사린(박하선)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오늘은 좀 힘들 거 같은데… 집에 좀 일도 있고 그래서…”라고 어색하게 둘러대며 안절부절못한다. 사린은 아직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지지만 커피 한 잔도 망설여진다.
7일 공개된 카카오TV ‘며느라기2...ing’의 한 장면이다. 초기 임산부의 평범한 일상을 별다른 사건 없이 풀어가며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십년 전 아이 생겼을 때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느낀다” “정말 현실 드라마” 등의 시청자 댓글이 줄을 잇는다.

치밀한 현실 고증을 앞세운 하이퍼리얼리즘 드라마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수신지 웹툰 원작 ‘며느라기’(2020∼2021)의 시즌 2 격인 ‘며느라기2...ing’와 왓챠 오리지널로 네 번째 시즌을 시작한 ‘좋좋소’, 의사 출신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내과 박원장’(티빙) 등이다. 현실 어디선가 있을 법한 이야기가 세일링 포인트다. 좀비와 타임슬립 등 초현실적 설정이 흔한 드라마 세계에서 ‘역판타지’로 승부를 거는 셈이다.

지난달 14일 첫 방송을 시작한 ‘내과 박원장’은 초짜 개원의의 서글픈 현실을 시트콤 형식으로 담아낸다.
돈 많은 명의를 꿈꾸며 ‘내과 박원장’을 개업한 박원장(이서진). 손님 없는 진료실에서 고민이 크다. 병원 수익이 직원의 주식 투자 수익보다 못하고, 환자용으로 비치해둔 커피믹스 비용도 부담스럽다. ‘진상’ 환자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험 청구를 위해 허위 진단서를 작성해달라질 않나, 상비약을 보험 처방으로 해달라고 억지를 쓰던 환자는 거절하는 박원장에게 악플 테러를 경고하고 간다. 매출을 올리려고 진료 과목을 소아청소년과로 확대하고 야간진료까지 시도했는데, 이러다 과로사할 위기다.

'내과 박원장'. 커피믹스 비용 하나라도 줄여보려는 박원장의 노력이 짠하게 펼쳐진다.  [사진 티빙]

'내과 박원장'. 커피믹스 비용 하나라도 줄여보려는 박원장의 노력이 짠하게 펼쳐진다. [사진 티빙]

지난 4일 공개된 8화 방송에선 술 취한 박원장이 대리운전 기사에게 이렇게 하소연한다.
“환자는 없는데 병원이 너무 많아요. 매년 젊은 의사들은 쏟아져 나오는데 정년이 없으니 윗물은 고이죠. 병원 다 마케팅이고요. 이럴 거면 애초에 의대에서 마케팅을 알려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저씨, 대리는 많이 버나요?”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내과 박원장’의 의사는 그동안 의학드라마에서 히어로 아니면 빌런, 양극단으로 그려졌던 의사와는 다르다. 일반 자영업자와 같은 고충을 겪는 직업인으로 묘사하며 공감대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부터 왓챠에서 공개하는 ‘좋좋소’는 이번이 시즌 네 번째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이과장과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기획ㆍ제작한 유튜브 콘텐트로 출발해 시즌4부터는 왓챠 오리지널로 방송된다. 극 중 이과장 역으로 출연도 하는 이과장은 시즌4 제작발표회에서 “왓챠에 진출해서 너무 기분이 좋다”면서 “대한민국 직장인 중 90% 이상이 중소기업에 다니는데 드라마나 매체에서는 대기업ㆍ전문직 이야기만 하지 않나. 그래서 중소기업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다.

앞선 시즌에서 체계 없는 즉석 면접, 믹스커피와 컵라면이 전부인 회사 복지, 회식 후의 더치페이 등 열악한 중소기업의 현실을 섬세하게 묘사해 인기를 끌었던 ‘좋좋소’는 시즌4에선 극 중 백차장(김경민)이 독립해 차린 백인터내셔널까지 무대를 확장했다. 기존 정승네트워크와 백인터내셔널, 영세업체끼리의 처절한 생존 전쟁이 ‘웃픈’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유뷰트 콘텐트에서 출발해 시즌4부터는 왓챠 오리지널로 방송되는 '좋좋소'. [사진 왓챠]

유뷰트 콘텐트에서 출발해 시즌4부터는 왓챠 오리지널로 방송되는 '좋좋소'. [사진 왓챠]

하이퍼리얼리즘 드라마는 ‘숏폼’ 콘텐트에 최적화한 장르이기도 하다. ‘며느라기2...ing’  ‘내과 박원장’ ‘좋좋소’ 모두 회당 길이가 20∼30분 정도다.
김선영 대중문화평론가는 “사이즈가 작아지면 디테일로 승부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축소된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갈등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오리지널로 승부를 봐야하는 OTT 플랫폼에선 제작비 한계 때문에 사이즈 작은 콘텐트를 찾아야 하는 만큼, 사람에 대한 밀착 관찰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정덕현 평론가도 “길이가 짧기 때문에 드라마타이즈하기 힘들고 그냥 상황을 찍어내듯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라며 “형식이 내용을 만들어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팍팍한 현실이 하이퍼리얼리즘 장르의 인기 배경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선영 평론가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먼 미래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총체적으로 조망하기 힘들어졌다”는 데서 “그동안 드라마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일상의 하찮은 이야기가 먹히는 이유”를 찾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하이퍼리얼리즘 드라마의 ‘힐링 효과’를 꼽았다. 시청자들이 찌질한 현실의 극 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젊은 친구들의 현실이 너무 힘들다.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비슷한 상황을 보며 용기도 얻고 위안을 받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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