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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처음, 3월 6일이면 끝…무령왕릉 유물 5232점 한눈에 본다 [아이랑G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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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백제로 가는 타임머신, 무령왕릉 

1971년 여름, 인부의 삽질 한번이 고고학계를 뒤흔들었다. 백제 25대 왕, 무령왕이 묻힌 무령왕릉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은 3월 6일까지 특별전시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를 통해 출토유물 5232점 전체를 최초로 한자리에서 공개한다. 국보를 중심으로 왕·왕비 관련 유물은 상설전시실(웅진백제실), 발굴 과정부터 앞으로의 과제까지 이야기는 기획전시실로 나누어 선보인다.

왕의 머리 부분에서 서로 겹쳐진 상태로 발견된 왕의 관꾸미개. 금판을 두드려 얇게 편 다음 오려서 불꽃 모양으로 무늬를 만들고 달개를 달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머리 부분에서 서로 겹쳐진 상태로 발견된 왕의 관꾸미개. 금판을 두드려 얇게 편 다음 오려서 불꽃 모양으로 무늬를 만들고 달개를 달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전시를 기획한 윤지연 학예연구사는 먼저 디지털 실감 영상관의 ‘무령왕릉 1448년간의 이야기’ 관람을 추천했다. 무령왕이 사망한 523년부터 왕릉이 발굴된 1971년 사이 기간인 1448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지 전문가의 고증에 상상을 더해 만든 콘텐트다. 무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령왕과 왕비가 언제 어떻게 무덤에 안치됐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 발굴되기까지 약 8분에 걸쳐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디지털 무령왕릉에서 나오면 상설전시실 입구에 놓인 작은 은잔 하나가 관람객을 맞는다. “발굴 당시 왕비의 머리 쪽에서 발견된 받침 있는 은잔”이라고 한 윤 학예연구사는 뒤편에 크게 확대해 놓은 용·봉황·인면조 같은 신수를 비롯해 연꽃·사슴·산봉우리 등의 조각을 가리켰다. “은잔에는 잔 몸체뿐 아니라 뚜껑·받침에도 빼곡하게 음각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어요.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처럼 신선의 세계를 담아내 당시 백제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죠.”

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하는 데 치른 오수전. 당시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돈으로 무령왕대 백제가 활발하게 국제 교류를 했음을 보여준다.

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토지신에게 땅을 매입하는 데 치른 오수전. 당시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돈으로 무령왕대 백제가 활발하게 국제 교류를 했음을 보여준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거대한 유리 진열장이 눈에 띈다. 실제 무령왕릉과 같은 크기 진열장 안에는 발굴했을 때 그대로 유물을 배치해뒀다. 맨 앞에 놓인 동전꾸러미는 당시 중국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이다. “오수전을 비롯해 무령왕릉 유물은 중국제거나 중국식 물건을 백제에서 만든 게 많아요. 관에는 일본산 금송을 썼고요. 이는 당시 백제가 활발하게 국제교류를 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 뒤에는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가 우뚝 섰다. 중국 후한대부터 나타나는 진묘수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 중국에선 돌·흙·나무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의 재질로 만들었지만 무령왕릉의 진묘수는 머리의 뿔은 철제고 몸은 석제란 점, 입술을 비롯한 몸 일부를 나쁜 기운을 막는 의미로 붉게 칠한 점 등이 다르다. 작고 귀여워 보이지만 우리나라 유일한 것으로 엄연한 국보다.

국립공주박물관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 선보이는 ‘무령왕릉 1488년간의 이야기’를 통해 널길에서 바라본 무덤방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 선보이는 ‘무령왕릉 1488년간의 이야기’를 통해 널길에서 바라본 무덤방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여기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게 있다. 오수전 밑에 깔린 돌판이다. 이름은 묘지석(墓誌石).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 및 사망·매장 시점 등이 기록돼 있다. “무령왕이 먼저 돌아가시고, 왕릉에 모실 때 돌판 2매 앞뒤로 총 4면 중 3면에 왕의 묘지(墓誌), 간지도(干支圖), 매지권(買地券)을 기록한 후 왕비를 추가로 모시면서 매지권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썼어요. 매지권이란 말 그대로 무덤에 쓸 토지를 매입했다는 거죠. 오수전이 땅값을 치른 돈이고요.”

이 돌판 두 장이 바로 무령왕릉이 특별한 이유다. 고대 무덤 중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천마도가 나와 천마총, 금관이 나와 금관총이라 부르는 식이다. 묘지석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하면서, 삼국사기 내용에 신빙성을 더하기도 했다. 묘지석 역시 국보다. 실물은 기획전시실에서 앞뒤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복원된 왕과 왕비의 목관을 살펴보고 있다. 재단 흔적과 결합방법부터 못·장식에 이르기까지 정밀 조사 결과를 반영해 복원했고, 3D 스캔을 통해 실제 크기로 재현한 것도 함께 전시한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복원된 왕과 왕비의 목관을 살펴보고 있다. 재단 흔적과 결합방법부터 못·장식에 이르기까지 정밀 조사 결과를 반영해 복원했고, 3D 스캔을 통해 실제 크기로 재현한 것도 함께 전시한다.

그 뒤로는 그릇·수저 등을 올린 제사상이 놓였고, 출토된 목재 조각을 토대로 복원한 왕과 왕비의 관이 자리한 묘실이 나온다. 1500년 전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나마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당시 최고 품질의 목재를 사용해서다.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한 금송에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옻칠을 해서 관을 짰다. 두 개의 목관은 복원품 외에도 재단 흔적과 결합방법부터 못·장식에 이르기까지 정밀 조사 결과를 반영, 3D 스캔을 통해 실제 크기로 재현한 것도 함께 전시됐다.

무령왕릉 유물에는 묘지석·진묘수를 포함해 12종 17점의 국보가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는 실제로도 금 함량이 높다고 윤 학예연구사가 귀띔했다. 천으로 된 모자에 꽂아 장식했던 관꾸미개는 각각 머리 부분에서 겹쳐진 상태로 발견됐는데, 왕의 관꾸미개는 금 함유량이 98.0~99.1%, 왕비의 것도 99.0~99.2%에 달해 순금(24K)에 가깝다. 각각 금판을 얇게 두드려 편 다음 오려서 무늬를 만들었으며, 불꽃처럼 피어나는 모양인 왕의 관꾸미개는 달개를 가득 달아 더 화려하다.

왕비의 금동신발은 발굴 당시 뒤꿈치가 부서져 없어진 채였다. 이후 바닥 잔존물에 섞여있던 파편들을 모아 복원했다. 왕의 신발과 달리 안팎 모두 금동판을 사용해 바깥쪽에 육각무늬를 맞새김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 등을 새겼다.

왕비의 금동신발은 발굴 당시 뒤꿈치가 부서져 없어진 채였다. 이후 바닥 잔존물에 섞여있던 파편들을 모아 복원했다. 왕의 신발과 달리 안팎 모두 금동판을 사용해 바깥쪽에 육각무늬를 맞새김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 등을 새겼다.

이어 귀걸이 등 장신구가 눈길을 끈다. 왕의 금귀걸이는 각 53.4g, 54.7g의 무게로 국내에서 발견된 금귀걸이 중 가장 무겁다. 금을 얇게 펴 만든 하트형 판 위 기둥에는 금 알갱이를 하나하나 박아 장식했고, 나뭇잎 모양 달개를 잔뜩 연결한 끝에는 곡옥(구부러진 옥)을 달아 백제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보여준다. 왕의 것보다 얼핏 수수하게 느껴지지만 지금 당장 착용해도 세련돼 보일 금귀걸이·은팔찌·금목걸이 등 왕비의 장신구도 여럿이다. 그중 은팔찌는 용무늬로 감싼 안쪽에 글자가 새겨져 언제 누가 이 팔찌를 만들었고, 생전에 왕비가 착용했던 걸 무덤에 같이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유물로는 무령왕 부부의 베개와 발받침을 빼놓을 수 없다. 훼손 우려로 그동안 복제품을 전시했던 것을 진품으로 선보이는데, 현재 왕의 것은 진품, 왕비의 것은 복제품으로 볼 수 있다. 처음으로 실물이 공개된 왕의 베개·발받침은 나무에 옻칠을 한 뒤 금판을 이어 육각형 무늬를 만들고 모서리와 중앙에 달개가 1개 달린 꽃모양 꾸미개를 붙여 장식했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안 남쪽에서는 베개가, 북쪽에서는 발받침이 각각 놓여있었다. 왕의 것은 나무 표면에 옻칠을 한 뒤 장방형 금판으로 육각형 무늬를 만들고 모서리와 중심부에 1개의 달개가 달린 꽃모양 금꾸미개를 붙여 장식했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안 남쪽에서는 베개가, 북쪽에서는 발받침이 각각 놓여있었다. 왕의 것은 나무 표면에 옻칠을 한 뒤 장방형 금판으로 육각형 무늬를 만들고 모서리와 중심부에 1개의 달개가 달린 꽃모양 금꾸미개를 붙여 장식했다.

국보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은·청동 꾸미개까지, 이 많은 유물은 어떻게 발굴했을까.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왕릉원(구 송산리고분군)에서 배수시설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사도, 도굴꾼도 피해 기적적으로 온전히 나타난 무령왕릉에 당시 전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장마철 침수 위험에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 등 상황이 여의치 않자 최초 발굴 작업은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삽으로 퍼담는 지경으로 유물을 박물관으로 피신시킨 것. 이를 반면교사 삼아 2년 뒤 천마총 발굴 때는 철저히 외부와 격리해 작업했다는 후일담까지, 무령왕릉 발굴에 얽힌 영화 같은 이야기는 기획전시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장소: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기간: 3월 6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박물관은 방역패스 적용 시설로, 만 11세 이하인 경우만 예외로 인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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