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2016년 촛불은 정말 혁명이었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혁명을 끝내는 법

생각의 공화국

생각의 공화국

정치혁명, 사회혁명, 산업혁명 등 인류 역사에는 혁명의 시절이 있다. 개인의 삶에도 혁명 같은 순간이 있다. 예컨대, 지금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선배 한 분에게도 수십 년 전 20대 전반의 혈기로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질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맨주먹으로 미래의 장인 장모에게 시위하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허락하고 축복해 주십시오!” “직업도 없으면서 대체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나!” “어떻게든 자신 있습니다!” 그 시위 덕분이었을까, 그의 혁명은 성공했다. 결혼에 이르렀고, 아이를 낳았으며, 이 사회의 성실한 시민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마저 결혼해서 출가하자, 그 선배는 신혼 때처럼 부인과 단둘이서 생활하게 됐다. “다시 두 분만 사니까, 좋지 않으세요? 맨주먹으로 신혼 생활하던 옛 시절을 함께 다정하게 회고하고 그러세요?” 선배는 허탈한 웃음을 흩뿌리며 대답한다. “그런 옛날이야기 꺼내면, 나 집에서 쫓겨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어보아야 시시콜콜한 삶의 애환만 듣게 될 것이 뻔했다.

혁명은 순간이고 일상은 계속돼
정치든 사랑이든 낭만은 시들어
완전한 동지도 적도 없는 세상사
혁명의 완성은 주체적 개인일 뿐

영화 ‘1987’과 고전소설 ‘춘향전’

허구의 세계 속에서나마 멋진 체험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지, 혁명적이거나 낭만적인 사태를 다루는 작품은 대개 극적인 순간을 클라이맥스로 삼아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터 6월 항쟁까지 격변의 시절을 다룬 영화 ‘1987’을 보라. 고문과 억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청년들과 운동가들과 시민들은 군부 독재를 몰아내기 위해 질주한다. 안타까운 죽음을 넘어, 100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서 이른바 6월 민주항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그다음은 보여주지 않는다.

‘춘향전’은 어떤가. 신분 질서가 엄연하던 조선시대. 야심적인 처녀 춘향과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도련님 몽룡이 질주한다. 신분상승욕, 성욕, 혹은 사랑에 불타서 질주한다. 남원에 새로 부임한 수령 변학도가 가혹한 고문을 가해도 변절하지 않는다. 암행어사 출두요! 끝내 그 고문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한 쌍의 부부가 되는 ‘혁명’이 일어난다. 그 사회혁명을 클라이맥스로 삼아 ‘춘향전’은 마무리된다. 춘향과 몽룡은 그 이후 자식 낳고 잘 살았다고 할 뿐 그다음은 보여주지 않는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주제곡으로 유명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은 어떤가. 미국 캘리포니아 중산층 출신 모범생 벤저민은 이웃의 중년 부인 로빈슨 부인의 유혹에 넘어가 일탈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뒤이어 바로 그 로빈슨 부인의 딸 엘레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질투에 눈이 먼 로빈슨 부인은, 자기 딸에게 자신과 벤저민의 불륜을 폭로해버린다. 충격을 받은 엘레인은 벤저민을 떠나 사랑하지도 않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자 결혼식장에 들어간다. 이에 벤저민은 식장에 난입하여 엘레인의 손을 잡고 도망쳐 나와 버스에 오른다. 영화는 끝난다.

기득권 세력에 편입된 운동가들

그 이후 벤저민과 엘레인은 과연 잘 살았을까. 버스 뒷좌석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벤저민과 엘레인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단한 모습이었다. 몽룡과 결혼한 춘향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반가 정실부인이 되어 봤자 별거 없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주변 양반 부인들이 왕따를 시키지 않았을까. 변학도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신경통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6월 항쟁을 주도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이른바 명망가들 상당수는 항쟁을 경력 삼아 정계에 입문한 끝에 결국 변절하지 않았나, 적지 않은 시민들도 일상 속에서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으로 변해가지 않았나. 이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아니, 궁금하지 않다. 혁명 이후의 구질구질한 다음 이야기를 하기 싫어서,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는 것으로 마무리했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사랑이든 정치적 사랑이든, 낭만적 순간들은 전체의 극히 일부다. 인생과 역사의 대부분은 그렇고 그런 일상이 채운다. 재미없는 비(非)혁명적 시간과 마주해야 한다. 그 일상의 나날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드라마가 없으므로, 그 체험은 멋지게 작품화하기 어렵다. 대만의 전설적인 명감독 에드워드 양의 영화 ‘해탄적일천’은 바로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다.

‘해탄적일천’에는 열렬한 연애를 하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탄웨이칭과 가리. 탄웨이칭은 전도 유망한 의대생과 열애에 빠지지만, 그 의대생은 완고한 의사 아버지의 바람대로 탄웨이칭을 버리고 다른 의사 집안의 사위가 된다. 그 의대생의 여동생 가리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집에서 정해주는 배필을 마다하고, 사랑하는 남자 더웨이와 살기 위해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가리와 더웨이는 ‘졸업’의 엘레인과 벤저민처럼 현실에 맞서 혁명과도 같은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 ‘해탄적일천’의 놀라운 구성

‘해탄적일천’의 놀라운 점은 이 선택이 영화의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해탄적일천’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춘향전’이나 ‘졸업’이나 ‘1987’이 모두 피해갔던 그 이야기.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 사랑 이후의 삶에 대하여, 혁명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에 몰입하는 남편이 된 더웨이, 그 같은 남편의 관심을 갈구하는 전업주부가 된 가리. 채워줄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점점 위기로 치닫는다. 그래도 남편을 계속 의지하고 살아 보고자 마음먹은 어느 날, 남편 더웨이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다. 이제 가리는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과연 남편이 맞는지 확인하러 해변으로 간다. ‘해탄적일천(海灘的一天)’이란 낭만적인 영화 제목은 바로 그 해변에서의 하루라는 뜻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하여 결혼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주체적 개인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완고한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했다고 해서 가리가 꼭 주체적 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야반도주라는 혁명적 사태를 치러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을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사랑이란 말로 치장했을 뿐, 결혼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바로 그 의존성 때문에 결혼 생활도 위기에 처한다. 야반도주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결혼했다고 생각하기에, 남편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완고한 군부 독재를 이겨내고 거리에서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체적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 사태를 겪었지만, 알고 보면 의탁 대상이 군부 정권에서 민간인 교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또 다른 타자에의 의존에 불과하다. 그 의존성 때문에 정치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가두시위라는 큰 희생을 치르고 혁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에, 정부에게 그만큼 큰 보상과 관심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혁명 이후의 일상을 살아 보면 선과 악은 그다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완고한 도덕주의자인 줄 알았던 아버지는 성추행범으로 판명된다. 아버지 편인 줄 알았던 어머니는 사실 딸의 야반도주를 알고도 묵인한 것이었다. 믿었던 남편은 술집 여자와 놀아나는 중이다. “당신은 팔자 좋은 환경에서 자랐나 보군요, 사랑을 믿다니.” 남편의 애인은 가리를 비웃는다. “사랑이라뇨. 이 세상엔 사랑은 없고 충동만 있어요.” 이 지점에 이르자, 억압에 저항하여 주체적인 참사랑을 성취했다는 가리의 낭만적 서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는 3월 대선 투표장의 선택

그 서사가 무너지자,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실제 남편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로소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결심과 함께, 가리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해변을 떠난다. 야반도주할 때도 되지 못했던 주체적 개인이 이제야 되어 떠난다.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매사가 복잡하고 흐릿하기만 한 현실을, 완전한 동지도 없고 완전한 적도 없는 뒤죽박죽인 세상을, 이제 주체적 개인이 되어 꾸역꾸역 살아갈 것이다. 사랑과 혁명의 의미마저 오롯이 재정의해가면서.

2016년 촛불 시위는 정말 ‘혁명’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혁명이었다면, 촛불혁명이 약속한 세상은 정녕 도래했을까.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외칠 뿐이라고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말한 적이 있다. 이제 3월이 되면, 해변에서 실종된 사람이 혁명아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주체적 개인이 되어 투표장을 떠나야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