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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기의 소통카페

다시 꿈꾸는 열린 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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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 커뮤니케이션학

우리에게 새해가 있는 건 행운이다. 시간이 앞으로만 가지 않고 뒤에도 있다는 지혜를 준다. 새해는 혼자 오지 않고 희망과 함께 오기에 우리는 과거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공간에서 더 낫게 사는 꿈을 가진다. 다시 새롭게 시작해보려는 꿈을 꿀 수 없다면 인간은 화학적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새해의 꿈은 능력이 되고 힘이 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세계를 더 넓고, 더 높고, 더 깊고, 더 풍성하게 열린 시공간으로 만든다.

새해에 즈음하여 대통령도 꿈을 얘기했다. 4년 9개월간 감옥에 있던 전 대통령을 특별사면·복권하면서였다. “우리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딛고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며 “과거에 매몰돼 서로 다투기보단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했다. “생각의 차이나 찬반을 넘어 통합과 화합, 새 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통합이나 화합과는 거리가 먼 갈등과 분열의 어두운 시간을 생각하면 만시지탄의 꿈이다.

5년 전 문 대통령의 공존 선언
자기들만의 닫힌 사회로 끝나
거친 말만 넘쳐나는 대선 정국
통합과 신뢰 어떻게 되찾을까

2017년 5월 10일 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는 통합과 공존에 대한 꿈을 세상에 들려주었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며 자신은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또한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한다”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갈 동반자”로서 취임의 날이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약속드린다”고 했다.

소통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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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8일,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37살의 딸이 울먹이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5월 18일에 태어난 딸을 보기 위해 근무지 완도에서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에 희생됐다. 그 딸이 연단을 떠날 때 대통령은 걸어나가 그를 껴안아주며 아버지 묘소에 참배하러 가자고 했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감동의 시공간이 대한민국의 더 많은 곳과 더 많은 마음으로 확대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지하지 않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 ‘함께 이끌어갈 동반자’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생각이 다른 국민 한 분 한 분도 껴안아야 했다. 광주에서 멈추지 말고 더 많은 국민의 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불행이다. 더욱이 집권세력이 자신들을 무오류의 집단으로 자처하고, 정책과 인사를 독단적으로 하고, 밀어붙이기 입법과 정책의 대못박기로 국가의 미래를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제1 야당과 비판세력의 존재를 적폐의 후손으로 부정한 것은 통합을 방해하는 오만한 처사였다.

이는 세계 10대 경제력을 지닌 국가에 걸맞은 백화제방의 생각과 선택의 경쟁 대신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를 강요하는 편협한 획일주의였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추상적 가치를 교조적으로 강제하는 사회는 전체주의의 닫힌 사회로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오는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뢰할 수 없는 말, 거친 말, 폭력적인 말, 막말, 검증되지 않는 말, 대한민국의 통합과 화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말, 국민과 역사의 편을 가르는 말이 쏟아지고 있다.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거나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과 같이 변신하는 모순의 궤변이 넘쳐나고 있다. 궤변론자로 불리는 소피스트(sophist)는 원래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옮겨 다니며 지식(sophos)을 가르치는 유식한 지식인이었다. 이들이 4세기 들어 궤변론자로 몰락한 것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말의 에토스(신뢰성)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통합의 열린 공동체는 신뢰할 수 있는 말에서 온다. 신뢰성은 말에 담긴 메시지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행동과 행적이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의 설득력은 논증력(로고스)이나 감정적 어필(파토스)보다 신뢰성(에토스)이 핵심이라고 했다. (『수사학 Rhetoric』) 새해에 간절하게 바라는 꿈은 소피스트의 말이 아니라 통합의 공동체로 이끄는 에토스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