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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 술 마시면 3집 벌 받는다…조선 영조 10년 금주령 저주 [역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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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주사거배' [중앙포토]

신윤복 '주사거배' [중앙포토]

"이 돈 내고 술을 사마시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덕분에 우리가 떼돈을 버는 거지."

은(銀)이 가득 실린 궤짝을 보는 중국 상인들이 싱글벙글 하는 사이, 조선 상인이 술을 들이키다가 한숨을 쉬며 내뱉습니다.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지 금주령을 10년이 넘게 하고 있으니까…"

KBS 사극 '꽃 피면 달 생각하고'의 한 장면. 바다 한가운데서 몰래 술을 거래하는 이유는 강력한 금주령 때문입니다. 밀주꾼을 단속하는 고지식한 감찰과 술을 빚어 큰 돈을 벌어보려는 밀주꾼 여인의 로맨스를 다룬 이 작품은 조선 영조 시대가 배경입니다.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 금주령을 이어간 국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수 차례의 금주령을 내렸는데, 영조 32년 내려진 금주령은 무려 10년간 이어졌습니다. 물론 농업 국가에서는 가뭄 등으로 인해 금주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통상 1~2년에 불과했던 금주령이 10년간 지속됐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토록 장기간에 걸친 금주령은 식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이라기보다 영조 개인의 도덕관이 개입됐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조선에서 술을 근절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KBS 사극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사진 KBS]

KBS 사극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사진 KBS]

하지만 제 아무리 의도가 선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을 무리하게 통제하려고 규제를 만들면 반발과 부작용을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령 시대에도 되려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마피아들이 밀주를 만들어 떼돈을 벌었듯이 조선 영조 시대에도 비슷한 부작용이 쏟아집니다.

금주령 시대의 그늘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금주(禁酒)를 내린 뒤로 술집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추조(秋曹·법률ㆍ소송ㆍ형옥ㆍ노예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와 한성부의 이속(吏屬)들이 별도로 금란방(禁亂房)을 설치하여 날마다 돈을 징수하며 기존의 법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영조실록』 28년 12월 20일)

관리들이 금주령을 뇌물을 받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죠. 사실 이 정도에 그친다면 대단한 부작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더 깊었습니다.
10년에 걸친 강력한 금주령은 행정력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공무원들이 통상적인 행정 업무보다 어느 집에서 술을 마시는지 감시하러 다니느라 바빴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공무원들로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을에서 누군가 금주령을 어긴 사실이 적발되면 해당 관리까지 엄하게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죠.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귀양까지 가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중앙포토]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 [중앙포토]

"금주령은 날로 엄하였으나 범하는 자는 그래도 그치지 않았다. 과천에 술이 있다 하여 그 지방관을 귀양보냈고, 또 강화도의 선상(船商) 중에 범한 자가 있으므로 강화 유수를 파직하였으며, 지방관인 양천 현감을 귀양보내고… 또 영광(靈光)의 뱃사람이 경강(京江)에서 술을 마셨다 하여 영광 군수를 남쪽 연변(沿邊)에 귀양보냈다." (『영조실록』 40년 5월 3일)

잦은 지방관의 교체는 결국 행정 업무의 연속성을 떨어뜨리고, 지방 토호나 기득권층이 활개를 치는 요인이 됩니다. 영조 시대에 암행어사 박문수가 유명했던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자기가 다스리는 고을에서 음주사실이 적발되면 귀양을 갈 판이니 공무원들이 음주 단속에 얼마나 혈안이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관리들이 툭하면 찾아와 술을 마시는지 감시하고, 밀은 술의 원료인 누룩을 만드는데 쓴다고 강제로 버리게 하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집에서 키우던 닭이나 돼지를 잡아야하는 등 그 폐단이 말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술 [일러스트=박용석]

술 [일러스트=박용석]

특히 원성이 높았던 것은 한 집이라도 술을 마시는 게 적발될 경우 이웃의 세 집까지 함께 처벌하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이웃끼리 서로 끊임없이 감시하게 만들었는데, 을(乙)과 을(乙)이 갈등하게 만드는 정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금주령 공포시대라고 불려도 무방한 시기였습니다. 보다못한 관료들이 직언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정언 구상(具庠)이 상소하였는데, "아! 금주가 민폐로 바뀐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망자가 계속 생겨나 분위기가 초조해져 도성이 술렁이고 있는데, 외방의 고을들이 더욱 심합니다. 장단지와 소금그릇까지도 남김없이 수색하고 옷상자나 곡식자루 따위가 죄다 훼손되고 있습니다. 밀은 누룩을 만드는 원료라 하여 먹지 못하게 버리도록 하고, 닭과 돼지는 그들에게 제공하느라 바닥이 나 종자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슬그머니 뇌물을 받는 우환이 또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관에서 나오는 차사(差使)들을 대접하고 이웃집에서 술을 담그는가 살피느라 잇따른 소요 속에 벌벌 떨면서 여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박절하게 이웃집까지 똑같은 죄를 주는 형률은 법을 신중히 하고 후세에 끼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영조실록』 40년 7월 23일)

서울 중랑구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여해고전연구소장 노승석 박사가 어사 박문수 가의 서신을 은닉한 문화재 사범으로부터 회수한 증거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노 박사가 가리킨 서신에는 '운봉지역 상황을 보고하자 영조임금이 박문수 어사에게 임무를 부여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연합뉴스]

서울 중랑구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브리핑룸에서 여해고전연구소장 노승석 박사가 어사 박문수 가의 서신을 은닉한 문화재 사범으로부터 회수한 증거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노 박사가 가리킨 서신에는 '운봉지역 상황을 보고하자 영조임금이 박문수 어사에게 임무를 부여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연합뉴스]

"정언 박상로(朴相老)가 상소하여 술의 금주령에 대한 폐단을 극구 논하고 10개 조항의 문답을 만들어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에 술을 쓰지 않아 예절에 위배되는 것이 첫째요, 빈객과 의약에 술을 쓰지 않아 인정에 위배되는 것이 둘째이며, 이웃에게 연좌법을 적용하는 것이 셋째요, 포도청이 금지하는 것을 맡는 것이 넷째이며, 차출한 관원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 다섯째요, 수령들이 이로 인해 자주 바뀌는 것이 여섯째이며, 법제가 이로 인해 자주 변경되는 것이 일곱째요, 형벌과 옥사가 이로 인해 많이 남용되는 것이 여덟째이며, 언로가 이로 인해 막히는 것이 아홉째요, 민심이 이로 인해 흩어지려고 하는 것이 열째입니다." (『영조실록』 40년 9월 11일 )

영조는 크게 분노하며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조는 금주령 덕분에 중범죄가 줄었다며 자화자찬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날 계복(啓覆· 조선조 때 임금에게 상주하여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던 일) 을 행하였다. 대벽(大辟·사형) 에 해당되는 사람은 3인뿐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를 범한 사람이 적은 것은 술을 금한 효과인가?"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엄중한 법으로 술을 금하였으므로 금주령을 범한 사람이 이따금 사형에 처해졌다. 또 인오(隣伍)를 서로 연좌시키게 하는 법을 만들어 한 집에서 금주령을 범하면 세 집이 같이 죄를 받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 했는데도 뭇 신하들도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조실록』 39년 11월 22일)

금주령을 반대한 연산군  
영조와 정반대로 술에 대해 접근한 것은 연산군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국왕은 완강하게 거부하는 180도 다른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물론 연산군은 '흥청망청'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을 정도로 워낙 유흥을 즐겼던 왕이니 금주령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미치광이처럼 알려진 연산군이지만, 금주령에 대한 그의 답변을 보면 나름 수긍이 간다는 점입니다.

영화 '간신'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연산군 [사진 네이버 영화]

영화 '간신'에서 광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연산군 [사진 네이버 영화]

"헌납 김지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심하니 금주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새로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 으레 경사 잔치를 베푸는데, 비록 한 가정의 일이기는 하지만 비용 드는 것이 역시 많으니,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금주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빈궁한 자는 반드시 금령에 걸릴 것이요, 세력 있고 부유한 자들은 반드시 뇌물로 면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도리어 민원만 사게 될 것이다."

『연산군일기』를 읽다보면 이런 상황이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연산군의 진심이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인지, 백성들을 아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금주령을 집행할 경우 힘없는 백성이 더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훗날 영조 때 상황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의 혜택을 받은 영조
고대 로마를 다룬 한 논문에 따르면 게르만 지역의 강수량은 로마 황제의 암살 가능성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르만은 당시 로마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비가 적게 내려 농사를 망치면 현지에서 군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게 되고, 군인들이 불만을 품으면서 국경이 어지러워져 황제에 대한 불안과 불신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광포한 로마 황제 코모두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광포한 로마 황제 코모두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렇다보니 농업 국가에서 식량 확보에 신경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금주령이 잦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하게 되면 곡물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영조의 금주령은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뭄이 10년이나 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영조 시대에는 쌀의 가격 하락을 걱정할 정도로 풍년이 든 적이 많았습니다. 영조는 농업국가의 군주로서는 기후의 축복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기후의 힘』의 저자 박재정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영조와 정조가 재위했던 18세기 중후반은 온난한 기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7세기 경신대기근 때는 반대로 저온습윤했다. 태양의 흑점이 적은 시기였는데 봄에 온도가 낮았고 여름·가을에 비가 많이 내렸다. 반면 영·정조 시기는 태양의 흑점이 많았던 시기로 기후가 양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에 정치가 안정된 것은 기후 도움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 [사진 MBC]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 [사진 MBC]

영조의 이토록 강력한 금주령 기조는 손자인 정조 때 뒤집어집니다. 반작용이었을까요. 정조는 할아버지와 달리 술에 대해 너그러웠고, 오히려 술을 즐겨 마셨습니다. 정약용도 각종 기록에서 정조가 신하들에게 술을 강권해 힘들었다는 내용을 남겼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52년간 재위하며 수 차례 금주령을 통해 '노알콜 국가'로 만들려 했던 영조의 야심찬 구상은 그가 가장 아끼는 혈육조차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의 헛된 집착에 백성들과 관료들만 고생을 시킨 셈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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