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범죄와의 전쟁에 이기려면… (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됐나. 딸자식 가진 부모나 집 가진 시민이면 하루도 방심하고 편안할 틈이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코흘리개 국민학생에서 건장한 청년에 이르기까지,언제 어디서 느닷없이 낚아채갈지 몰라서 불안해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걸핏하면 폭력에 살인이고,강도가 강간범으로 돌변하면서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불안케 한다. 용기있는 시민이 있어 고발이라도 하면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칼까지 들이대는 범인이 날뛰는 상황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가장 치안이 잘돼 있는 나라로 외국인들에게 알려졌던 우리 사회가 범죄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6공 들어서였다.
학자들은 작금의 사회상을 개탄하면서 오랜 억압체제에서 단숨에 개혁을 이루려는 「민주화 분위기」의 급진전에 따른 부작용으로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한다. 전통의 수직적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민주사회의 수평적 가치관이 미처 대치되지 못한 상태가 빚어낸 혼란이라는 것이다. 사회기강이 해이되고 규범과 도덕이 타락하면서 범죄와 준법의 구분마저 없어진 게 아니냐는 설명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그동안 축적돼 온 물질만능­찰나주의가 6공 들어 느슨해진 사회전반의 분위기를 틈타 범죄로 폭발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탕」만 하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생산현장보다는 유흥업소에 몰리는 것도 그런 풍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대로 취업이라도 하게 되면 그나마 나은 편이겠지만 그냥 「한탕」이나 하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떼를 이루게 되고,욕망을 충족시키려면 칼들고 나서는 범죄의 길밖에 더 있겠느냐는 부류가 늘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를 짓누르는 불안과 공포는 심각하다.
노태우 대통령이 13일 이같은 범죄와의 전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해 전쟁을 선언한다』며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 국민이 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를 소탕해나가겠다』는 대통령의 「선전포고」를 우리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범죄 병폐는 공동체 자체를 위협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판단은 옳다. 올들어 국내에서 끝나지 않고 남미·마카오에까지 무대를 넓혀가고 있는 조직범죄만 해도 그렇지만 기동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곳곳을 파고드는 현대범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통치권자의 결연한 의지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퇴치에는 어느 한 기관이 아니라 관련 기관간의 유기적 공조체제가 필수적이다. 예방­검거­처벌­사회환원이 통일된 체계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 대통령의 「전쟁」선포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싸워 궤멸시키겠다는 뜻으로 우리는 풀이한다.
지금 「적」은 고도의 첨단장비와 위장술을 총동원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유념,현실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각오하고 인력과 장비를 갖춰야할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유의해야할 점은 열명의 도둑은 놓치더라도 한사람의 선량한 시민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통령의 한마디면 이를 편리한 쪽으로 열마디쯤 나아가는 해석을 해온 것이 우리의 관료사회 풍토였다. 실적이나 올리려고 무고한 시민이나 고발한 사람을 괴롭히기라도 한다면,그래서 시민들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범죄와의 승부는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산업화 사회에서의 범죄는 인지단계부터 80% 이상을 시민신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통계도 있다.
여러번 지적돼온 일이지만 경찰관 무장은 사전에 충분한 준비단계를 거쳐야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격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경찰관들이 종종 필요 이상의 인명피해를 내온 지금까지의 예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같은 「선전포고」의 결의는 어디까지나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상황은 우선 시급을 요하는 대증요법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데 우리는 인식을 같이 한다. 다만 이와 병행해 「전쟁」에 나서는 공직자의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도덕성과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하고,정부가 전체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획득할 때 장기적으로 기대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살아있는 한 천군만마를 동원해도 이번 싸움에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은 없다. 범죄와 싸워야 할 공직자들의 범죄가 심심치 않게 터져나오고 그래서 그들의 사명의식이나 도덕성이 의심받고 있는 한 우리 사회에서 범법에 대한 죄의식도 침식될 수밖에 없고,근원적 처치는 어려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도시화·산업화 과정의 부작용을 제거하고 「범죄없는 사회」 「사회질서 확립」 「일하는 사회」라는 건전한 민주사회의 틀을 확립하는 데 집권 후반기의 시정목표를 두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통령의 이같은 의욕은 앞으로 관계부처를 통해 구체화될 것이다. 앞으로 남은 길지 않은 임기 동안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도록 깨끗해지려는 노력을 동시에 보여야함은 물론 정치권으로부터도 한 점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동기의 순수함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