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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한국에서 돌아와 중국을 생각하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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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지난 11월 말,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새벽녘에 도착한 인천공항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고, 감염병 관련 각종 검사과정도 감동스러울 만큼 매우 전문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보건소의 PCR 검사 과정도 수월했다. 미국의 처참한 코로나 대응을 경험한 나에게 한국의 차분한 풍경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온 것을 실감케 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에 올 때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한국 속담을 실감하곤 했다. 특히 이번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국에 쌓인 깊은 피로감과 오미크론 변종의 예측 불가능한 영향으로 일상생활이 악화된 모습에 크게 놀랐다. 한국의 공중보건 제도와 관료적 역량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은 코로나 ‘블루’(우울증)가 ‘레드’(분노)와 ‘블랙’(절망)으로 번지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2년간의 도전에 대처하는 한국의 회복탄력성과 적응력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도 다른 나라만큼 독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허위정보·정치화·양극화의 바이러스들이 한국에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한·미 모두 일관된 중국 정책 결여
경제·안보 간 경계도 모호해져
동맹간 정책의제 협력 강화하고
중국에 대해 더 깊이 대화해야

한국은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어떻게 풀릴까에 대한 걱정 말고도 고민거리를 많이 안고 있었다. 흥미롭지 못한 대통령선거, 청년층의 경제적 기회 박탈, 세대격차, 페미니즘과 반 페미니즘, 미국의 미래 향방에 대한 의구심, 고립된 북한의 다음 행보, 미·중 경쟁이 냉전(冷戰) 혹은 열전(熱戰)으로 갈 지, 주한미국대사 지명이 왜 늦어지고 있는지 등 다양하다.

이번 2주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든 생각은 무엇보다 한·미 양국이 중국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중국에 대한 이해와 관계 설정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계 지형의 큰 전략적 변화인 만큼 양국 간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모든 수준에서 허심탄회하고 지속적인 탐구가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도 미국도 일관된 ‘중국 정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의 대중국 정책은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중국은 한국의 핵심 경제 파트너이자 남·북한 관계 발전의 필수 요소였고 미국은 안보 파트너이자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만큼 결코 간단치 않았다.

‘경제를 위해서는 중국, 안보를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외교 공식은 진부해졌다. 경제 영역은 이미 안보 영역화되었다.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과 민감한 기술 및 지적재산권 보호 정책을 우선순위에 두거나 중국이 싫어하는 안보정책을 추진한 한국과 호주에 대해 중국이 강력한 경제 제재를 취하는 모습에서 보듯이 경제활동과 안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심지어 사라져버렸다. 중국에 대한 한국의 여론도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국은 북·중 관계, 지리적 근접성, 중국과의 길고 복잡한 역사적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은 쿼드(QUAD)부터 대만, 남중국해 의제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관련된 다양한 사안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잘 정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국가 안보 전략이 ‘대테러 대응(테러와의 전쟁)’에서 강대국 간 경쟁으로 전환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바이든 정부는 집권 초기 특히 아시아 동맹과 파트너십 강화, 쿼드·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등을 통한 다자간 협력 구축에 중점을 뒀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지난 14일 인도네시아에서 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이란 제목의 연설을 두고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중국보다 파트너로서 더 낫다는 ‘소프트파워’를 내세우면서 미·중간의 직접적인 대립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묘사했다.

지난달 15일에 열렸던 바이든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간의 온라인 정상회담에서 보인 부드러운 담론은 한국과 아시아 국가들에 환영할 만한 접근 방식이다. 다만 이번 정상회담이 미국이 중국을 ‘전략적 경쟁’ 상대로 보고 있다는 기존 관점을 바꾸지 못한 것처럼 블링컨 장관의 ‘포괄적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발언도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후 무역협상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공급망 복원력·청정에너지·탈탄소화·인프라·민주주의·백신 등 동맹국들과 더 많은 협력을 모색하고 있는 광범위한 정책 의제들의 윤곽은 드러났다. 이런 협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며 지역적·세계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다양한 민·관 접근법이 필요하다.

단 한 번의 연설이나 정상회담보다는 한국인과 미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자국과 중국간의 역사와 상호 관계에 대해, 그리고 공유된 미래에 대해 지속적이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오드 아르네 베스타(Odd Arne Westad) 예일대 교수의 『제국과 정의로운 국가: 600년 한·중 관계』를 다시 꺼내 읽었다. 베스타 교수는 저서에 “통일되고 평화로운 미래의 한국을 위하여”라는 헌정 문구를 넣었다. 그 미래를 달성하려면 우리가 처한 위기의 순간을 이해하고 더 잘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