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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유동성 파티가 끝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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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주열 한은 총재는 내년 3월 말 퇴임 전까지 기준 금리를 두 번쯤 더 올릴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온통 인화성 물질이 널려 있다. 부동산 시장은 미친 아파트값이 휩쓸고, 11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7%까지 치솟았다. 가계부채는 1800조원을 넘어 위험 수위다. 모두 추가 금리 인상을 부르는 요인들이다.

이미 내년 1월 기준 금리 인상은 상수가 됐다. 문제는 3월 말이다. 대선(3월 9일) 직후에다 한은 총재 임기 만료(3월 31일)와 겹치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전문성과 유연성을 모두 갖춘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지인들은 외유내강이라 입을 모은다. 상징적인 장면이 2017년 11월 깜짝 기준 금리를 올렸을 때다. 당시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8%에 머물렀지만 그는 미룬 숙제를 해치우듯 총대를 멨다. 숨겨진 매파 본능이다.

옛말에 ‘씨 종자는 먹지 않는다’
위기 진압의 최후 수단은 재정
선심성 공약만 판 치는 대선판
요즘 정치권 옛 농부보다 못해

내년 3월도 마찬가지다. 상식대로라면 차기 대통령이 자리 잡을 5~6월까지 한은은 총재 대행체제로 꾸려지게 된다. 3개월여 리더십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이 총재는 “마지막 소망이라면 거품을 남겨둔 중앙은행 총재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따라서 퇴임 전 다시 한번 금리 인상의 악역을 떠맡을 공산이 크다. 비정상적인 마이너스 실질 금리와 자산 거품을 그대로 두고 떠날 것 같지 않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서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버블이 시작된 1987년 10월,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3가지 사건에 발목이 잡혔다. 우선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두배로 뛰면서 수입물가가 확 떨어졌다. 물가상승률 0.1%에선 금리를 올릴 명분이 약했다. 여기에다 그해 9월 미국 무역적자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10월 19일엔 미국의 블랙 먼데이 주가 폭락까지 겹쳤다. 일본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손발을 묶어 버렸다. 그렇게 머뭇거린 2년간 버블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인재(人災)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부동산 붕괴가 장기화된 데도 숨은 비밀이 있다. 부동산 폭락에도 주택 공급이 줄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90년 이후 매년 공급이 140만~160만호에 달했다. 2009년에야 100만호 밑으로 떨어졌다. 그 수수께끼는 제 발등 찍기에 있다. 일본은 거품이 붕괴되자 경기부양을 반복했고, 재정 지출의 상당 부분을 기계적으로 공공 주택에 쏟아부었다. 부동산 거품 붕괴→경기부양→공공주택 공급 증가→부동산 하락의 악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미국은 전혀 딴판이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그 이전 연평균 170만호였던 주택 착공 건수가 순식간에 87만호로 반 토막이 났다. 민간 부문을 중심으로 주택 공급이 바닥을 치면서 추가 붕괴를 막은 것이다.

일본은행처럼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는 중앙은행은 존재 자체가 민폐다. 다행히 한은은 지난 7월부터 기준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작년 코로나 사태는 봉쇄와 소비 위축으로 심각한 디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올해 델타와 오미크론 사태는 정반대다. 초저금리에다 글로벌 공급망까지 병목 현상을 일으켜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부르고 있다. 내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동성 흡수와 금리 인상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제로 금리가 막을 내리면서 역사상 유례없던 유동성 파티가 끝물 조짐이란 것이다.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는 “돈 풀기가 끝날 때 고통이 드러난다”고 경고한다. 저금리의 금단증상은 심각하다. 버블의 또 다른 문제는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노련하게 바람만 빼야 하는데 어설프게 거품을 터뜨려 버리기 십상이다. 역사적으로 연착륙보다 경착륙이 훨씬 많다. 이런 공포 탓인지 국내에도 때 이른 부동산 급락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서울대 김경민 교수는 “기준 금리가 1.5%가 되면 집값은 2021년 6월 대비 10~17%가 빠질 것”이라 했다.

우리도 내년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현 정권이 흥청망청댄 유동성 잔치의 뒷 설거지를 감당해야 한다. 만에 하나 거품이 터지면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는 게 가장 큰 위험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도 “과도한 부채는 항상 금융위기로 끝났다”고 지적한다. 이럴 때 최후의 극약처방이 공적 자금 투입이다. 재정은 마지막 기댈 언덕이다.

그럼에도 대선판에 재정을 동원하는 선심성 공약만 쏟아지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이 “곳간에 재정을 쌓아두면 썩는다”고 했다가 사방에서 욕을 먹은 걸 잊은 모양이다. 재정은 소중한 종잣돈이다. 표를 낚기 위해 함부로 탕진할 대상이 아니다. 옛말에 ‘농부아사 침궐종자(農夫餓死 枕厥種子)’라고 했다. 농부는 굶어 죽을지언정 씨 종자는 먹지 않고 베고 죽는다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주역』의 ‘석과불식(碩果不食·씨 과실은 절대 먹지 않는다)’ 구절을 생명처럼 여겼다. 요즘 정치권은 수백 년 전 농부의 지혜에도 못 미친다. 정책 대결은커녕 저열한 인신공격과 포퓰리즘만 난무하고 있다. 갈수록 대선이 저렴해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