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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이면서 공적인 치킨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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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은 맛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맛없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에 불을 지폈고, 한동안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한국 농가에서 키우는 육계의 크기나 사육일수, 닭다리 살과 가슴살의 차이, 감칠맛을 내는 핵산 등등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런 공부 자체는 은근히 즐겁고 유익했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재미있다. 그게 사람이건 음식이건. 그렇게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상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때로 취향은 작은 철학으로 발전하고, 삶은 그만큼 풍성해진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치킨을 먹었던가.

객관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을까
좋은 사회 의미도 독점할 수 없어
나와 다른 의견 설득할 언어 필요

그런데 “한국 치킨 맛없다”는 황씨의 일갈은 그리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았고, 즐겨 먹던 치킨에 대해 모르던 부분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기분도 별로 들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거나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언어가 정밀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면서 “한국 치킨은 맛이 없다”니, 치킨은 튀김이 아니라 찜 요리란 말인가. 얼마 전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실시한 조사에서 해외 거주 외국인 8500명은 가장 좋아하는 한식으로 치킨을 꼽았는데, 그렇다면 다른 한식은 그가 맛없다는 치킨보다 더 맛이 없는 걸까.

황씨가 “한국 치킨은 재료의 섬세한 풍미가 없는 얄팍한 양념 맛이며, 신발도 튀기면 그 정도 맛은 난다”고 말했다면 어느 정도 수긍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한국 치킨은 객관적으로 맛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그래서 다른 일리 있는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음식 맛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똑같은 오이를 줘도 어떤 사람은 싱그럽고 상큼하다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도저히 못 먹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오이향이나 쓴맛에 민감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꽤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렇다면 오이의 객관적인 맛은 무엇일까. 객관적인 맛이 존재한다면 왜 많은 음식이 호불호가 갈릴까. 누군가는 옳고 누군가는 틀린 걸까.

황 칼럼니스트가 드는 근거는 농촌진흥청의 자료인데, 이 책자 자체가 국립축산과학원의 원본 논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몇몇 화학성분 함량이 맛의 전부를 결정짓는다는 식의 가정에 동의하기 어렵다. 맛은 미묘한 감각 경험이고, 양념은 물론이거니와 식당 분위기, 심지어 식기의 무게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음식 맛은 주관적이니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까.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업도 존재 의의를 잃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주관적이지만 공적인 대상으로서 음식 맛이라든가 어떤 소설의 작품성을 논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예술 평론 작업이 그런 바탕 위에서 이뤄진다.

한 취향 공동체가 주관적 체험들을 모아 논의하고 합의해 쌓아 올린 미학의 체계가 있다. 그 축적물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기 감상을 공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일이라 가끔 이름난 문인 중에도 이걸 못하는 이가 있다. 어떤 작품의 장점을 주장할 때 그저 “나 이거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반복하며 제 감정을 전염시키려 한다.

물론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영역이 아니므로 공동체의 합의는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고, 여러 사람이 단체로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했을 때가 그랬다. 당대 미술계 엘리트들은 인상주의 회화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 분야 전문가들의 언어는 늘 조심스럽다. 이곳의 언어는 훈계가 아니라 설득이다.

음식 맛과 예술 작품의 가치 외에도 주관적이면서 공적인 언어로 접근해야 하는 중요한 대상들이 있다. 삶의 이유, 좋은 사회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소득분배 정도를 측정해서 객관적인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범위의 수치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다. 공적인 언어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 뿐.

이 말을 이렇게 확장할 수도 있겠다. 좋은 삶, 좋은 사회의 의미를 어느 한 사람이 사적으로 독점할 수는 없다고. 불행히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어리석거나 부당한 권력에 야합하는 세력으로 비난하는 가짜 지식인들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