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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보국’ 박태준의 꿈, 고향 기장 임랑 바닷가에 되새겨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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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바닷가 트레킹 코스 ‘갈맷길’이 시작하는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하얀색과 녹슨 철이 어우러진 울타리가 들어섰다. ‘철의 사나이’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1927~2011)의 생가터를 일부 포함해 만든 박태준기념관이다. 13일로 10주기를 맞이한 그를 기리기 위해 기장군은 2015년부터 82억원을 들여 기념 공간을 조성했고, 14일 공식 개관했다.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중앙포토]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중앙포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탓에 성대하게 예정됐던 행사는 오규석 기장군수와 박 명예회장의 아들 박성빈씨가 기념관 입구에 무궁화 나무를 심는 식수행사로 간단하게 치러졌다. 무궁화는 박 명예회장이 ‘애국심의 상징’이라며 좋아했다. 기념관 내부 정원에는 평소 그가 동해를 바라보고 사색하며 그늘을 빌렸던 소나무가 자리했다. 기념관과 연결된 생가에는 부인 장옥자 여사 등 유가족이 여전히 생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수연 기장군 학예연구사는 “과거 기와집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 포스코에서 만든 철강을 가져와 재건축했다”고 설명했다.

박태준 기념관 내부 정원인 수정원의 모습. 박 명예회장이 그늘 아래서 명상을 즐기던 소나무가 배치돼 있다. [사진 박태준 기념관]

박태준 기념관 내부 정원인 수정원의 모습. 박 명예회장이 그늘 아래서 명상을 즐기던 소나무가 배치돼 있다. [사진 박태준 기념관]

특별전을 준비하는 전시 공간에는 그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과 가족 간 주고받은 엽서·편지 등이 전시됐다. 마을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도서관과 카페도 한켠에 자리 잡았다. 그의 국가에 대한 헌신과 포스코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유품은 수장고에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1968년 4월 1일 포항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를 출범시킨 후부터 제철소 건설 현장에 항상 지니고 다니던 지휘봉이 눈에 띄었다. 이 학예사는 “유족이 기증한 것으로 당시 포철 마크가 새겨진 유일한 지휘봉”이라고 말했다. 벽에는 포철 건설 현장에 방문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역시 한 손에 이 지휘봉을 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포철 건설 기간 중 13번 현장을 방문했다.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게 건설 현황을 설명하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진. [사진 박태준 기념관]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게 건설 현황을 설명하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진. [사진 박태준 기념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 때 지니고 다닌 지휘봉. 문병주 기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 때 지니고 다닌 지휘봉. 문병주 기자

“실패하면 우향우로 영일만에 빠져 죽자”  

박 명예회장은 박 대통령이 추진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핵심 프로젝트였던 포철 건설을 1967년 11월부터 추진했다. 당시 철강산업은 ‘산업의 쌀’로 통했다. 이후 1992년 10월 연산 2100만t을 달성하면서 포철 회장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25년간 한국의 철강 산업을 이끌었다.

포항제철소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중앙),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왼쪽), 김학렬 당시 부총리가 폭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중앙포토]

포항제철소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중앙),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왼쪽), 김학렬 당시 부총리가 폭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중앙포토]

포철 건립 당시 그가 임직원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회자된다. “우리 선조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이기 때문에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 그 유명한 ‘우향우 정신’이다.

그의 말처럼 포철 건설에는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중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이 투입됐다. 총 5억 달러(유상 2억 달러, 무상 3억 달러)의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1억1948만 달러(24%)였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출선에 성공한 뒤 박태준 명예회장(가운데)을 비롯한 포스코 직원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 포스코]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서 첫 출선에 성공한 뒤 박태준 명예회장(가운데)을 비롯한 포스코 직원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 포스코]

『박태준 평전』(2016년)을 집필한 이대환 작가는 그의 제철보국(製鐵報國) 전략을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 일류 국가 건설로 가는 길’이라고 요약했다. 처음엔 기술·경험·원료가 없어 일본 기술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8년 12월 포철 3기 완공 후에는 일본기술단이 완전히 철수했다.

그는 1987년 철강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베서머 금상을 수상하며 철강 왕좌에 올랐다. 이런 그를 보고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청암(靑巖)이라는 아호를 지어줬다. 이 회장은 그를 ‘살아 있는 경영 교재’라고 치켜세웠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권자 등소평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기도 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생전 머리맡에 두고 지낸 서예 액자. 문병주 기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생전 머리맡에 두고 지낸 서예 액자. 문병주 기자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  

수장고에는 해외 출장 갈 때 가지고 다니던 낡은 여권 지갑도 보관돼 있었다. 지갑 표지에는 과거 포철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침실 머리맡에 걸어두고 지냈다는 서예 액자도 눈에 들어왔다. 두 개의 액자에는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최근 추모 도서『박태준 생각』을 펴낸 포항지역사회연구소 편찬위원들은 “그가 남긴 공적의 탑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삼일치가 만든 위업이다. 그러나 공적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그것을 성취하게 만들었던 그의 정신·고뇌·투쟁이다. 이 무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스코그룹 최정우 회장과 경영진이 13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서거 10주기를 맞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포스코그룹 최정우 회장과 경영진이 13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서거 10주기를 맞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포스코는 지난 13일 국립현충원에서 10주기 추모 행사를 조용히 치렀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10년 전 마지막으로 당부한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바란다’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되새기고자 한다”고 밝혔다. 포스코는 글로벌 철강전문분석기관인 월드스틸다이내믹스(WSD)의 평가에서 12년 연속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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