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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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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평소에 일기(日記)를 안 쓰더라도 한 해를 정리하는 연기(年記)는 써보는 것이 좋다. 올해의 일들을 월별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욕심을 조금 더 내자면, 월별로 사건을 나열하기보다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일 년을 회상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만의 ‘올해의 인물’ ‘올해의 책’ 등을 선정해보는 것이다. 올해의 인물이 타임(TIME)지만의 전유물이 될 필요는 없다. 올해의 책이 교보문고만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올해의 시, 올해의 색깔, 올해의 소리, 올해의 꽃, 올해의 디저트, 올해의 여행 등 주제들은 무궁무진하다. 한 해를 근사하게 장식하는 비결은 이런 주제들로 글을 써보는 일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글쓰기 필요
자기만의 ‘올해의 ○○’ 리스트
자서전이면서 최고의 유산될 것

올해의 공간

올해 최고의 소득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 일이다. 그 카페는 천장이 높고 햇빛이 잘 들어서 숨쉬기가 편하고 일 년 내내 따뜻하다. 형형색색의 케이크들이 진열되어 있지 않아서 커피를 주문할 때 갈등을 경험하지 않아서 좋다. 소박한 분위기라서 정신도 소박해진다. 무언가를 읽고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약간의 긴장감을 제외하면 그곳에 가는 길은 늘 편안하다. 올해는 이 카페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올 한해 당신에게 자기만의 공간이 있었는가?

올해의 인물

아무런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시몬 베유가 『중력과 은총』에서 한 주장이다. 섣부른 위안이 통하지 않는 불행을 경험할 때, 비로소 형용할 수 없는 위안이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시몬 베유는 사유한다. 위안할 수 없는 불행(중력)과 그때 내려오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안(은총)을 경험할 때, 우리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진 빚에 관대해질 수 있고, 삶의 관심을 온전히 ‘지금 여기’에 둘 수 있게 된다.

위안이 통하지 않는 불행과 형용할 수 없는 위안을 동시에 준 올해의 인물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지난달에 돌아가셨다. 부모의 죽음이라는, 위안이 불가능한 불행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을 경험한 한 해였다. 당신의 올해의 인물은 누구인가?

올해의 문장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멋진 순간을 얼마나 가졌는가로 평가된다.” 올해를 지탱해준 고마운 이 문장은 마야 안젤루라는 작가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출처는 불분명하다.

모든 날이 좋은 날일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날에도 좋은 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행복 천재들은 소소한 경험이라도 하나를 포착해서 숨 막히는 경험으로 바꿔놓는다. 그 경험을 충분히 만끽하고 천천히 음미하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 나중에도 그 경험을 맛볼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것, 이 모두가 행복 천재들의 기술이다. 올해의, 당신을 붙잡아준 문장은 무엇인가?

올해의 음식

올해도 참 많이 먹었다. 다행히도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 음식이나 배 속에 넣었던 기억은 많지 않다. 음식에는 늘 진심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올해의 음식은, 어느 가을날 저녁에 동네 레스토랑에서 선 채로 마셨던 두 잔의 화이트 와인이다. 우연히 마주친 동네 레스토랑 셰프의 손에 이끌려 선 채로 마셨던 와인, 적당한 온도, 적당한 산미, 그리고 동네 사람의 따뜻한 마음, 내성적인 내게서 나온 극적인 외향성의 표출이라 더더욱 잊기 어려운 올해의 음식이다. 당신에게는 올해의 음식이 있는가?

올해의 노래

일곱 살 김유하양이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아! 옛날이여’. 소위 천재라는 사람들은 우리를 얼마나 주눅 들게 하던가. 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천재성이라서 좋았던 노래. 심리학자라는 사람이 일곱 살에게도 옛날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된 노래. 당신의 올해의 노래는 무엇인가?

올해의 여행

가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올해의 여행은 가족 여행이 아니다. 중년 남자 넷이 떠났던 여행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놀기만 했는데도, 너무 노는 것 아닌가 하는 한국 사회 특유의 죄책감이 들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런 여행이 필요하다. 당신의 올해의 여행은 무엇인가?

나만의 ‘올해의 ○○’ 시리즈를 매년 작성하면 자신에게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자서전이 될 것이고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될 것이다.  연말은 글쓰기 딱 좋은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