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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로봇과 감정이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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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얼마 전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로봇박람회 ‘2021 로보월드’ 현장에서 4족 보행 로봇을 넘어뜨렸다가 ‘로봇을 학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후보는 성능실험을 위해 주최 측에서 권유한 일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대중의 눈에는 로봇을 다루는 모습이 다소 난폭하게 비친 모양이다. 한갓 기계에 불과한데, 왜들 그렇게 불편해 하는 걸까?

사실 이 소동은 처음이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균형회복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4족 보행 로봇을 난폭하게 걷어차는 영상을 공개한 적 있다. 그때도 전 세계의 네티즌들이 ‘로봇 학대를 중단하라’는 표어와 로고를 만들어 퍼뜨리며 이에 항의한 바 있다. 로봇이 고통을 느끼는 것도 아닐 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 기능성 로봇은 기계로 분류
최근엔 AI 장착한 반려로봇 등장
로봇학대 논란, 감성이 바뀐 때문
기술발전이 가져온 변화 수긍해야

로봇 제작자와 로봇 사용자가 로봇을 대하는 태도가 같을 수는 없다. 공학자들은 로봇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로봇을 온갖 극한적 조건에 몰아넣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괴롭혀야 한다. 반면 그 로봇과 더불어 살아야 할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반려 로봇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당연히 부당한 ‘학대’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두 집단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정이입’(empathy)이다. 로봇을 개발할 때 공학자는 되도록 감정이입을 배제해야 한다. 그래야 그 어떤 조건에서도 기능하는 좋은 로봇을 만들 수 있다. 반면 사용자의 경우에는 로봇과 감정이입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이입을 끌어내는 기계야말로 성공한 로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로봇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원반처럼 생긴 청소 로봇이나 자동차 공장의 조립 팔을 생각해 보라. 이런 기능성 로봇(service robot)에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로 그 외양이나 행동이 인간이나 동물을 빼닮은 반려 로봇(companion robot)들이다.

듣자 하니 최근 로봇의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한다. 로봇에 인공지능이 장착되면서 과거의 기능성 로봇들은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 그냥 기계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적 로봇(social robot), 즉 인공지능을 장착해 유사 인격체로 행동하는 기계만이 본격적인 로봇, 진정한 로봇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감정이입이 로보틱스의 중요한 주제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첫 논문이 등장한 후 최근 10년 동안 로봇과 감정이입의 관계를 다룬 논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아주 거칠게 구분하면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로봇에 감정이입 능력을 부여하는 과제, 다른 하나는 로봇에 인간이 감정을 이입하는 문제다.

전자는 물론 인간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에 적합한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로봇을 개발하는 공학적 과제다. 후자는 로봇이라는 유사 인격체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학적 논의, 혹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관련된 복잡한 철학적, 윤리학적 논의다. 이번에 문제가 된 ‘로봇 학대’ 논란은 물론 후자의 문제영역에 속한다.

그깟 기계에 감정을 이입하다니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이다. 실제로 이재명 후보의 지지자들은 고작 기계에 ‘학대’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그저 자기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동원한 부당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로봇을 학대했다고 비난하는 이들의 동기가 마냥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번 논란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감성의 변화를 보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개를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개의 식용에 거부감을 느낀다. 얼마 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개식용에 반대한다’면서도 ‘식용견은 따로 있다’고 했다가 커다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사회적 감성이 달라진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로 여겼다. 다만, 신이 만든 기계라서 인간이 만든 기계보다 더 복잡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반려견을 해부하기까지 했다. 그의 제자 말브랑시에 따르면 동물은 기계라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동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부품과 부품이 맞부딪혀 내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게 ‘정상’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 누군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사이코패스’로 간주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동물들도 우리처럼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안다. 얼마 전 파스타를 만들려고 무심코 조개들을 산 채로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뜨거운 열기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사회적 감성이 변한 것이다. 이른바 ‘로롯 학대’ 논란은 사회적 감성의 ‘역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과거에 인간들은 생명체마저도 죽은 물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벌써 죽은 사물까지도 일종의 생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로봇이 생명을 닮아갈수록 이 경향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타자의 고통을 대신 느끼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기술이 가져온 이 변화를 이제 긍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